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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오시 Oct 19. 2023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

뭐 일단, 상상은 공짜니까

(작성일: 2022. 11. 12)


미래를 생각해 보자면 언제나 파지를 줍는 할머니나 지하철 역 앞에서 구걸을 하는 할머니가 되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용직 지하철역 청소부를 하다가 허리가 나가던지 손목이 나가던지 하여간에 불의의 사고로 불치의 병을 얻어 정부에서 주는 약간의 보조금으로 고시원이나 쪽방촌에서 근근이, 죽지 않을 정도로 연명하며 평생을 뭔가에 아파하다 그렇게 고독사하는 모습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러다 최근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부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로또에 당첨되기를 바란 적도 없다. 내게 그런 행운이 올 턱이 없으니 말이다. 그저 내 소박한 바람이 있었다면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은 노동에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많지는 않은 돈으로 아끼고 아끼면 먹고는 살 수 있는 삶을 꿈꾸었다. 저금은 당연히 할 수 없기에 큰돈이 필요한 병에 걸리진 않을까,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될 때면 언제든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나면 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직장에서도 큰 욕심이 없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도 버겁고 더군다나 나이를 먹어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줄어드는 게 마치 누군가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실제로 내가 겪어낸 객관적인 현실은 썩 나쁘지 않다. 개발자로 커리어도 차곡차곡 쌓고 있고 (쌓여가고 있고), 돈을 쓰는 법도 잘 몰라서 자연스럽게 돈이 모였다. 하지만 늘어나는 통장 잔고는 내 젊은 시절의 시간들이 숫자로 환산된 것일 뿐이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희망의 빛줄기가 들어오는 틈의 입구는 넓어지기는커녕 점점 그 사이를 좁히고 있었다. 살아온 대로 살아간다면 분명 금세 완전히 닫혀버릴 것이다. 그러면 영영 출구를 찾지 못하고 컴컴한 그곳에서 질식해 버릴 것이다. 때문에, 내 상상의 미래는 해가 바뀔 때마다 더 불행하고 더 구체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이런 불안감이 들었던 것 같다. 당장에라도 벼랑 아래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이 영혼을 잠식했다. 희망찬 미래가 보인 적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가끔,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금세 사라졌다. 나는 어째서인지 언제나 잘나고 잘된 사람들의 이야기보다 못살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쏠렸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저런 사람들도 저렇게 견디며 사는데 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예습을 해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저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다 — 저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자고.


이런 내가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아니 감히 해 볼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했던 걸까? 아일랜드에 온 지 삼 년이 넘어가면서 마음의 힘이 많이 길러졌다는 것을 느낀다. 행복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점차 많아지더니 지금은 내 모든 날이 행복하다고 해도 마음 한켠에 찔리는 구석이 없다. 이런 내가 과거의 나를 보면 참 우습고, 또 많이 가엾다. 하루를 밀어내는 충분한 힘이 생기면서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끌고 가고 싶은 욕구도 서서히 커진다. 이 전에는 무시하고 넘어갔던 자기계발 동영상이나 책들도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보면 마음에 알러지가 나는 것 같았는데 내면의 힘이 생기니 이제는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것들이 있고 그중에는 크게 마음이 동하는 것들도 있다. 그런데 내가 본 많은 동영상이나 책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부자가 되려면 일단 무의식부터 세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는 상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하라. 사이비처럼 들리는 이 말은 사실 요즘 새로 생겨난 것은 아니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도 ‘시크릿’류의 책들은 유행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의 시크릿은 특히 돈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쨌거나 이런 말을 반복해 들으며 깨달은 것이 있다. 내가 단 한 번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나이 서른다섯에 놀라운 발견이다. 참 낯설다. 부자가 된다는 상상? 부자가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파지를 줍는 할머니. 무엇인가 불치의 병이 생겨 하루종일 누워있어야만 하는 신세. 냉장고를 열면 주먹만 한 밥덩이와 일회용 비닐봉지에 담겨있는 아주 조금 남은 신김치… 그리고 이것은 삼일 치 식량이다 — 이런 상상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꽤 구체적으로 해왔으면서 부자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부터 막막하다. R=VD(Realization = Vivid Dream)이라고 하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평생에 가난한 미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니. 맙소사.


나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해왔다. 성격상 겁이 많아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소위 말하는 성공이란 것도 탐한 적이 없다. 일찌감치 그런 것들은 나와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와 명예.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왜 꿈도 꾸기 전에 포기부터 했을까? 뭘 제대로 해본 적도 없으면서 무엇에 피곤함을 느꼈던 것일까?


지금에야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마음의 힘이 없었다. 마음의 힘은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코어 힘 같은 것이다. 코어 힘. 어떤 운동을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코어의 힘이다. 코어는 뿌리와도 같다.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는데 나는 뿌리가 없었던 것이다.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가 높게 자랄 수 없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이제는 파지 줍는 할머니는 그만 생각하고 대신 부와 명예를 가진 할머니 상상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다.


뭐 일단, 상상은 공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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