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5주년을 기념하는 메일을 받고 하는 회고
2년 차는 1년 차와 비교해 큰 변화 없이 지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 때문에 락다운이 시작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발전보다는 현상유지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버티는 것이 중요한 시기였다.
다행히 회사생활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팀원들이 다들 무난한 성격이라 큰 갈등도 없었다. 되돌아보면 사회 전반적으로 정체된 시기였기에 오히려 개인적인 발전을 하기에 참 좋은 기회였는데 막상 도전적인 과제가 주어지지 않으니 일상생활에서 쉽게 동력을 찾지 못했다. 또, 모바일 개발이라는 커리어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방향을 잡지 못하고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정신적인 에너지가 크게 소모되던 시기여서 스스로에게 잘 견뎌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한편, 2년 만기로 주어진 CSEP비자 만료날이 점점 다가오면서 다음 단계인 Stamp4 비자를 무탈하게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회사에는 나보다 먼저 입사해서 같은 과정을 일찍 시작한 직원이 꽤 많았고 모두 문제없이 비자를 받는 걸 보면 큰 걱정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편하게 두 손 놓고 있기에는 아일랜드의 전반적인 시스템에 신뢰가 가지 않았다. 이곳은 당연한 프로세스에서도 실수가 발생하고 그 실수를 고치는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리는 곳이다. 모든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전산화된 한국과 달리 많은 부분에서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의 업무가 반나절 이내에 처리되는 것이 당연했던 한국인으로서 아일랜드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면 처음에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인프라가 충분치 않기에 발생하는 갖가지 실수들을 이해하고 인내해야만 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였지만 5년이 지난 이제는 참고 기다리는 것에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사실 아직도 완벽히 적응된 것은 아니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판데믹이라는 세계적 재난 상황에서 정말 감사하게도 무탈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락다운으로 사람들과 물리적 교류 없는 재택근무를 하며 햄스터휠처럼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알게 모르게 많이 우울했던 것 같다.
3년 차에 접어들며 판데믹 상황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거리제한이 완화되며 텅 비어있던 더블린 시내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사람들로 다시 북적이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도 경기회복을 기대하며 판데믹기간 동안 발생한 손실을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을 하고 있었고, 이 시도 중의 하나로 기획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평소 매니저와 1:1 미팅을 가질 때 모바일 커리어보다는 백엔드를 포함한 풀스택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어필했었다. 그 덕분인지 이를 기억하고 있던 매니저가 기술스택이 넓은(할 일이 더 많은) 새 프로젝트에 합류하도록 권했던 것이다. 취직하기 전 React를 공부하며 포트폴리오 사이트 몇 개 만들어 본 경험이 내 관심사를 어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실전은 연습과 다른 법. 개인적으로 공부했던 React도 중요하긴 했지만 백엔드 쪽으로는 Microservices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했는데 이 쪽으로는 새로 접하는 분야가 너무 많아서 어느 한 분야에 시간을 투자해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실전에서 경험하며 배우는 수밖에 없었는데 좋은 동료들과 한 팀이 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내 근무경력을 통틀어 일을 제일로 잘했던 직원을 만났다. 그가 일을 하는 것을 보며 정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나도 어디 가서 일 못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진정한 에이스가 무엇인지 그를 보고 깨달았다. 언제나 회사일을 생계수단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긴 나와는 달리 일 자체를 즐기면서 열심히 하는 그 동료를 보니 멋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 덕분에 일과 삶에 대한 가치관을 재정립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프로젝트 기간 내내 즐겁게 일했고 마무리도 잘 되어서 서비스를 런칭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실 사용자가 늘지 않아서 결국 프로젝트가 중단된 것이다. 회사 입장에서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는 상품이었기에 납득할 만한 결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아쉽게 끝났지만 모바일개발자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전향하는 데 초석이 된 프로젝트였다.
2022년 말부터 회사가 인수될 거라는 얘기가 나왔고 결국 2023년 초에 다른 회사에 인수가 되었다. 코로나 판데믹 한 복판도 잘 지나왔는데 오히려 경기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이전만큼의 퍼포먼스를 내지 못해 문제가 됐던 것이다. 하지만 이 때는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 많은 회사들의 인수가 일어났고 대량의 인력들이 해고되는 때였다. 당연히 실험적으로 진행하던 모든 프로젝트들은 중단이 되었고 손해를 이익으로 전환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었다. Legacy프로젝트를 현대화(Modernise) 하기 위한 최신 기술 스택을 기대하며 입사한 직원들이 대부분인데 인수가 되고 나서 Legacy 프로젝트에 다시 집중해야 하자 내부적으로 불만이 쌓였다. 나 또한 이 전 프로젝트가 중단이 되면서 다른 팀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모바일개발 커리어보다는 백엔드 쪽을 더 하고 싶었기 때문에 팀 이동이 있기 전에 매니저에게 개인적인 어필을 했다. Legacy든 Modern이든 어떤 일이 주어지던지 열심히 하겠다고 말이다. 다행히도 나를 좋게 생각하고 있던 매니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어 드디어 공식적인 백엔드 개발자로서 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 전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백엔드 쪽으로는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라 테크니컬 한 부분에서는 팀원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내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대부분의 시간이 팀원들과 미팅을 하며 방향성을 잡는 데 쓰였기 때문에 이 전 보다 팀원 간의 케미도 중요했다. 아주 간단한 함수 하나를 만드는 데에도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 회의를 했다. 이제까지 해왔던 모바일 개발은 눈에 보이는 아웃풋을 두고 논의를 했었지만 백엔드 개발은 그 성격부터가 달랐다. 겉보기로는 티도 나지 않는 아주 작은 수정을 하기 위해 시스템 전체 설계를 고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모바일 개발 경험과는 달리 이제는 팀원과의 협력이 필수였다. 백엔드 개발 경험이 많지 않은 나는 그래서 내가 잘하는 부분을 집중해서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힘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내 성격적인 강점이라서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부족한 면이 많았어도 주어진 업무에 대한 퍼포먼스는 떨어지지 않았다.
백엔드 개발자가 되고부터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커졌기에 영어실력에 대한 부담이 훨씬 커졌다. 대충 알아들을 수 있어도 진행할 수 있었던 프론트엔드 개발과는 다르게 백엔드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이 없으니 남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고 내 의견도 잘 개진해서 협상을 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너무 많은 요소들을 한꺼번에 배우고 발전시켜야 해서 한편으로는 어떤 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커리어 전문성에 대해 꾸준히 걱정했지만, 일단은 모든 경험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도전을 즐기기로 했다.
백엔드 팀에 합류하며 AI와 관련된 기술을 다루는 방향으로 전향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ChatGPT를 일상의 곳곳에서 사용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호기심이 솟구쳤다 - 도대체 어떻게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걸까. 작동 원리가 궁금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AI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싶다고 기회가 될 때마다 사람들에게 얘기를 했다. AI를 한다니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인공지능과 관련된 세부 분야도 몰랐으면서 참 호기로웠다. 하지만 실상 '인공지능'이라는 키워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때문에 우선 이렇게 내 관심사를 공개적으로 말을 하면 어떤 형태로든 그 결과가 되돌아오겠거니 했다. 그리고 이 작전은 성공했다. 사람들은 AI라는 주제를 들을 때마다 나를 태그 하며 관련 세션을 소개했고, 슬랙 채널에 초대를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매니저가 내부에서 공고된 데이터엔지니어 채용 소식을 전해주며 한 번 도전을 해보라고 귀띔해 주었다. 실패를 해도 잃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데이터엔지니어(Data Engineer)는 생소한 롤이었는데 검색을 해보니 내가 하고 싶은 인공지능과 관련된 알고리즘을 다루는 직접적으로 다루는 데이터사이언스(Data Science)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데이터를 전공하지 않은 내 경력으로는 이 필드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좋은 경험을 해본다는 생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을 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보고 나서 덜컥 합격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한 두 달 전부터 본격적으로 데이터엔지니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근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라 아직도 조금 어안이 벙벙하다.
데이터엔지니어라는 영역은 기초 지식도 부족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은 지식을 흡수하느라 바빠졌지만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내 모습을 보는 게 즐겁다. 최종적으로는 데이터사이언스를 하고 싶은데 우선은 내게 주어진 업무부터 잘 해내는 역량을 갖추는 것이 최우선이라서 2-3년 정도는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대한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돌이켜보니 5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는데, 현재에 집중하며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모여 지금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 같다. 과연 5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느 곳에서 살고 있을까 몹시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