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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오시 Oct 02. 2024

5년간의 해외 직장생활을 돌아보며: 1년 차

입사 5주년을 기념하는 메일을 받고 하는 회고

Happy 5th Anniversary!

올해 9월 9일, 입사 5주년을 기념하는 메일을 받았다.

그렇다.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벌써 아일랜드에 온 지도 5년이 넘어가고 있다.

주어진 하루를 열심히 살아내는 데 집중하느라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건 이렇게 의미 있는 알람을 받고 잠시 멈춰 서야만 보이는 것 같다.

이번 기회에 해외 직장생활 5주년을 기념하며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기록해두려고 한다.



1년 차 (2019.09~2020.08)

정말 운이 좋게도 학생비자가 끝나기 전에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아일랜드의 학생비자는 6개월간의 학습기간과 2개월의 방학을 포함해서 총 8개월이 주어진다. 이 비자는 두 번 연장이 가능하므로 총 세 번의 학생비자를 신청하면 2년을 아일랜드에서 보낼 수 있지만 이미 2019년 초반에 캐나다 워홀 비자가 확정된 나로서는 첫 번째 학생 비자가 만료되면 바로 캐나다로 갈 생각이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입국 유효기간이 1년이었다. 때문에 이 기간을 활용해 우선 아일랜드에서 영어실력도 늘리고 간간히 취직활동도 하며 캐나다에 가기 전 해외생활 예행연습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캐나다에서도 취직을 못하면 다시 아일랜드로 돌아와 두 번의 학생비자를 사용할 기회가 있으니까 심적으로 안정감도 들었다. 어학원 링고스파이 카일 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국에서 중고급 개발자로 일을 하던 경험 덕분에 IT인력이 부족한 아일랜드에서 직장을 구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도 하셨으니 굳이 캐나다까지 가지 않아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카일 님의 조언과 도움이 없었다면 아일랜드를 경유하지 않고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바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이런 긍정적인 조언들로 나의 기대가 너무 높아진 탓일까. 막상 아일랜드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시작해 보니 생각보다 높은 취업시장 문턱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모든 회사가 이미 취업비자인 Stamp1이나 Stamp4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비자가 없다고 하면 대화를 시작할 수 조차 없었다. 아일랜드는 학생비자로도 합법적인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학업이 주 목적인 '학생'을 위한 비자인 만큼 주 20시간의 근무시간만 허용되는 등 제한 사항이 많다. 제대로 된 직장인이 되려면 회사가 지원해 주는 취업비자를 받아야 하는데 회사입장에서 자국인도 아닌 타국인에게 이 비자를 발급하는 건 추가 비용과 시간이 드는 번거로운 일일 뿐이다.


덕분에 초반 3개월 정도는 낯선 곳에 적응하며 영어공부에만 집중해보려고 했는데 일찌감치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시작해야 했다. 캐나다 워홀 이 전 예행연습을 할 생각으로 너무 많은 힘을 들이지 않으려고 했는데 실력이 아닌 비자 문제로 매번 거절을 당하다 보니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익숙한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동하는 것이 큰 스트레스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생각을 바꾼 큰 이유였다. 단기간 여행만 다녀본 나로서는 이동을 하는 데 소모되는 체력적, 정신적, 금전적 비용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심적인 안정감을 주던 캐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켰다. 아일랜드에서 실패한다면 과연 캐나다에 간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아일랜드에 정착하기 위해 한 고생을 또 해야 한다니! 그래서 LinkedIn을 포함해 가능한 많은 채용 사이트를 들락거리며 이력서를 난사(?)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참 힘든 시기였지만 이렇게 이력서를 마구 뿌려댄 덕분에 막 유럽시장을 넓히려고 진입한 회사의 눈에 띄어 인터뷰를 하고, 결국 잡오퍼까지 받아 취업비자인 CSEP(Critical Skills Employment Permit, Stamp1) 비자를 받고 일을 시작했다. 이 은혜로운 회사는 내 학생비자가 끝날 때까지 주 20시간만 근무하는 것을 허용해 주었기에 본격적인 근무 시작 전, 취업 비자를 기다리는 기간 동안 금전적으로도 큰 도움을 주었다. 현지에서 오랜 기간 지내온 분에게 듣기로 학생비자에서 취업비자로 전환해 취직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나도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더라면 한국을 떠날 용기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정도는 무식에서 나오는 용기도 필요한 것 같다.


아일랜드에 학생비자를 발급받아 온 것은 결과적으로 취업이 목적이었고, 취업이 목적이었던 것은 최대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커리어가 아니라 합법적인 거주 비자가 목적이었던 나로서는 비자를 지원해 준다니 앞뒤재지 않고 겁도 없이 들어간 셈인데 입사를 하고 보니 정말 좋은 문화를 가진 회사였던지라 이 때는 운이 모든 역할을 했다고 보면 된다. 나의 첫 회사에게는 아무리 감사 인사를 해도 부족하다. 좋은 문화와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장기간 일을 하다 보니 한국에서 박살 나버린 개발자로서의 멘탈을 회복할 수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직업에서 행복을 느끼고 삶에 의미를 찾게 되었다.



오피스 구석 내 자리. 아일랜드에 진출해 인력을 늘려가던 때라 아직 텅 빈 책상이 많다
Rathmines ❤️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반년정도가 지나니 회사 생활에 벌써 적응이 되어서 해외취직의 새로움으로 타올랐던 열정도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다. 원래 하던 커리어를 연결해서 구한 직장이라 일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서 하던 근무와 비교하면 그 난이도가 너무 쉬워서 지루할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외주 프로젝트로 수익을 내던 회사였던지라 항상 일정 압박에 시달렸으며 규모도 작았기에 혼자서 앱 개발의 a부터 z까지 도맡아 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언제나 전력질주를 해야만 간신히 골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자사의 앱을 개발하는 경험을 해보니 일정에 대한 압박도 크지 않고(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자본과 규모가 있는 회사였기에 개발인력도 여러 명이었다. 때문에 기술적으로 새로운 것보다는 이제까지는 경험하지 못했던 높은 수준의 개발문화를 배웠다. 특히 미팅을 많이 했는데 이 때문에 실제로 업무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아도 하루가 참 바쁘게 흘러갔다. 미팅은 크게 개발팀내부에서 진행하는 미팅과 팀외부인력과 함께 진행하는 미팅으로 나뉘었다. 개발팀의 외부인력이라고 하면 디자이너와 Product Manager/Owner가 있고 따라서 앱의 디자인과 기능적인 부분에 대해 상의하고 팀끼리 피드백을 주고받았다. 개발팀내부에서 진행하는 미팅은 대부분 할 일을 정량화하는 작업이었는데 초반에는 이 작업의 필요성을 알지 못해서 개인적으로 불만이었다. Sprint Planning 혹은 Grooming이라고 하는데 할 일을 티켓으로 만들고 그 티켓을 리뷰하며 이 티켓을 처리하려면 얼마 정도의 노력과 시간이 들지, 예상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되도록 상세히 논의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작업이다. 해야 하는 일이 분명하고 모든 팀원들이 이 세션에 참여하는 것이 능숙하다면 일주일에 한두 시간이면 충분한 작업이겠지만 사실 이렇게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 않을 때도 많고 어떤 팀원이 하나의 주제에 꽂혀 너무 깊이 들어가면 결론도 내지 못할 대화를 30분 이상 지속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 과정이 만만치 않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에 이걸 할 시간에 차라리 일을 바로 시작했다면 미팅이 끝날 때쯤 벌써 티켓 하나는 끝냈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속으로 투덜댄 적도 많다. 하지만 이제는 여럿이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오랫동안 잘 달려가려면 조금 속도가 느리더라도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 일을 단단히 다지는 과정이 필수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실력 있는 Sprint Planner를 만나서 그가 어떻게 프로젝트를 진행을 하는지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 지금 나는 업무를 하며 배운 Sprint Planning기술을 개인 태스크 관리하는 데에도 도입해서 사용 중이다.(Jira는 개인이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해외 직장생활을 시작한 1년 차에는 해외에서 개발 문화를 배우는 소중한 경험을 했다.


한편, 2020년 초반에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전 세계적인 재난이 발생했다. 코로나 판데믹이 터진 것이다. 비즈니스 여행업을 하는 우리 회사에게는 존망을 결정하는 큰 사건이었다. 천만다행으로 모회사가 워낙 기반이 튼튼하고 자본력이 강했기에 별 탈 없이 잘 버텨나갈 수는 있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를 판데믹에 타지에서 연고도 없이 지내는 것이 늘 불안했다. 이 시절 어쩌면 회사는 나의 동아줄이었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동아줄 말이다.


(5년 치의 내용이 길어져서 연차별로 나누어 업로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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