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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오시 Jul 07. 2024

퇴사를 하지 않고도 한 달 휴가를 다녀왔다

28일이라 쓰고 한 달이라 읽는다

나에게도 한 달이라는 휴가를 퇴사를 하지 않고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정확히 말하면 4주(28일)이지만 한 달이라고 퉁쳐 말하면 기분이 더 좋으니까 한 달이라고 할 거다.


4주에 해당하는 정확한 휴가 일수는 토요일과 월요일을 제외하면 20일인데 뱅크홀리데이(Bank holiday)가 하루 낀 덕분에 19일 치의 휴가를 사용했다. 연휴 신청은 올 초 비행기 티켓을 끊음과 동시에 당당히 했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쁠 만한 얘기는 누구에게서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휴가 일정을 물어볼 때마다 브라질행이 처음인 내게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며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었다.


우리 팀은 2주 단위로 일을 하는 애자일(Agile) 방법론을 실행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마다 2주 동안 할 일을 계획해서 티켓으로 만든 다음 이 티켓을 닫는(close) 것이다. 스프린트가 종료될 때까지 닫지 못한 티켓은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회고하는 시간도 갖는다. 이렇게 팀원이 모여 개선점을 논의한 후 다음 스프린트에 반영한다. 이 과정이 반복이 되면서 한 팀이 납품(delivery)할 수 있는 적정량의 일감이 수치화된다. 이렇게 티켓으로 일의 양을 수치화하는 것의 장점은 한 사람당의 납품량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1인분의 역량과 스프린트에 참여할 인원수를 곱해서 팀이 납품할 수 있는 만큼의 티켓을 다음 스프린트로 가져가기 때문에 한 사람이 빠진다고 해서 5명이 해야 할 일을 4명이서 떠맡게 되는 상황이 생기지 않는다. 일감이 나머지 팀원들에게 몰리지 않기 때문에 한 달이나 되는 장기 휴가가 가능한 것이다.


한국인인 나는 아무에게도 눈치 받지 않는 한 달 휴가가 오히려 불안했다. 내가 없어도 일이 잘 굴러간다면 회사 입장에서 그 사람을 고용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의 부재가 괜찮음을 스스로 증명하는, 내 발등에 총을 쏘는 어리석은 짓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의심 때문에 그간 장기 휴가를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길게 쉬는 것보다 짧게 여러 번 쉬는 것을 선호해서 한 번도 장기 휴가가 필요한 적이 없었을 뿐이다. 하지만 올해는 장기간 브라질에 갔다 와야 할 일이 생겨서 내심 걱정이 됐다.


내가 했던 최장기간 여행은 10년 전 3주의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공휴일이나 주말을 포함하면 13~15일 정도의 휴가 일수로 짤 수 있는 일정인데 10년 전에는 물론이고 지금도 한국의 대부분의 회사에서 이 정도의 연휴를 사용하는 것은 퇴사를 하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그래도 이 때는 여행을 하려고 퇴사를 한 것이 아니라 퇴사를 생각하고 있을 때 친구가 여행을 제안한 것이었다. 일에 대한 회의감으로 이직 계획이 없을 때라 예산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만큼의 여유시간을 또 언제 가질 수 있을까 싶어 정말 큰 마음을 먹었다. 조금의 비용도 낭비할 수가 없었기에 되도록이면 온라인에서 저렴한 티켓들을 미리 찾아 결제하면서 덤벙대는 내 성격에 행여 다른 날짜나 시간을 예약하지 않도록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여행 중에도 돈을 아끼느라고 친구와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주머니에 여유가 없으니 마음에도 여유가 없어서 여행이라기보다는 마치 하드코어 미션을 수행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다녀오고 나서야 모든 순간이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가성비를 내고 싶었다. 재직 중인 상황이었더라면 훨씬 여유로웠을 것 같은데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몹시 한탄스러웠다. 퇴사를 안 하면 여행을 못 가고, 여행을 가려면 퇴사를 해야 한다니.


안타깝게도 이 짤의 원본 출처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작자님의 안녕을 기원합니다.


이탈리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 중 나와 같은 프로그래머가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 앞에서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 말고는 같은 업종이 맞나 싶을 정도로 우리는 많이 달랐다. 미국 구글에 재직 중이라는 그는 프로젝트가 끝나고 한 달의 휴가를 내서 유럽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행 중 그가 만난 다양한 프로그래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엮어 책으로 내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분은 내 메일 주소도 받아갔는데 그 후로 연락은 없었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지 싶다. 그때의 나는 야근이 많고 일정이 빡빡하다는 불만을 제외하면 직업에 대해 할 수 있는 얘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전(vision)도 없이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내 말은 내가 듣기에도 매력이 없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으로 반짝이던 그의 눈동자가 기억난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일이 힘들 때면 이 분이 종종 떠올랐다. 지금쯤 어떤 프로젝트를 마치고 어디를 여행하고 있을까. 그런데 시간이 흘러 이제는 나도 그분처럼 한 달 휴가를 퇴사를 하지 않고도 다녀올 수 있다니. 아일랜드에 온 지 이제 5년 차가 되면서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아주 많이 당연해졌지만 이렇게 가끔씩 상기를 할 때면 감사함으로 숙연해진다.


장기 휴가로 인한 불이익이 정말 없는 것인지 의심이 쉽게 가시진 않았지만 COVID Pandamic이 해제되고 나의 보스를 포함한 다수의 직원이 3주 이상의 장기 휴가를 쓰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놓였다. 다문화 근무환경인 우리 회사는 본국에 다녀오기 위해서라도 장기 휴가를 쓰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스프린트 방식에 익숙해지자 장기 휴가는 나의 부재가 괜찮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나의 부재가 괜찮도록 회사가 처음부터 고려를 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가를 다녀왔더니 내 책상이 사라져 있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관점을 달리하면 나의 부재가 회사에 타격이 되는 것이 오히려 회사 입장에서는 피하고 싶은 상황이다. 내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인력 자원(resource)에 불과하다는 것이 각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격적인 부분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만 생각되었으나 이것이 결코 쉬운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균등한 분배가 이루어져서 서로의 빈틈을 채워가며 질 높은 업무 환경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개념임을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나의 부재가 회사에게 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를 포함한 모두에게 이롭다는 걸 알게 되었다. 메인 개발자가 한 명인 소규모 회사가 어떠한 이유로든 이 개발자의 퇴사로 인해 프로젝트가 중단되거나 심하면 회사가 망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는가? 때문에 우리 회사에서는 한 사람에게 지식이 독점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문서화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는 등 모든 팀원들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지식 공유(KT, Knowledge Transfer)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사실 말만 들으면 아름답고 이상적이지만 예산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실행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회사 역시 적은 비용으로 최대한의 가성비를 내는 것이 최대 목적이니까. 우리 회사도 작년 초에 인수가 되면서 예산이 줄어 상황이 전보다 어려워졌는데 그래서 오히려 전부터 잘 갈고닦아온 좋은 문화를 지키려고 하는 숨은 노력들이 이제야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장기 휴가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도록 하는 모두의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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