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6일
매일 저녁, 회사 건물 앞에서 혹은 집 문턱에서 “수고했어”라고 카톡을 보내면 누나는 어떤 날은 바쁘다고, 어떤 날은 피곤하다고, 혹은 그냥 대답할 여유가 없다고 퉁명스레 지나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매일같이 그 짧은 인사를 멈추지 않는다. 누나가 어떤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아들일지 궁금하고, 동시에 언젠가는 조금 더 긴 대화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늘 어땠어?’라는 질문 한마디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자주 묻기도 힘들고, 대답하기도 쉬운 질문 같지만, 그 여운은 의외로 깊다. 에리히 프롬이 말했듯 인간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나의 이야기’가 아닌 ‘타인의 감정’을 먼저 바라봐야 하니까. 그런 맥락에서 보면, 내가 퇴근인사를 건네는 일은 사실 ‘나의 안부’를 묻는 게 아니라 ‘누나의 하루’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누나는 무슨 기분일까. 가끔은 내게 “너도 고생했어”라고 말해 오는 그 태도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우리는 서로의 진심을 속속들이 알 수 없지만, 누나의 짧은 답변 안에서 느껴지는 것은 ‘이 순간, 나는 대화를 강렬히 원하고 있구나’라는 작은 자각이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콧은 ‘소통은 서로의 틈새를 조심스럽게 엮어가는 과정’이라 했는데, 퇴근길의 짧은 인사가 바로 그런 자그마한 실마리가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대화가 쉽게 터지지 않을 때가 있다. “우리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볼래?”라는 말 한마디가 꺼내기 어려울 만큼. 아니면 이미 누나도 자신의 하루를 다 말하기엔 지쳐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건네는 퇴근인사를 멈추고 싶지 않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잘한 일상 속에서, 두 사람만의 의식을 하나 만들어나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미셸 푸코는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규율과 관습이 우리를 묘하게 편안하게도 하고 동시에 어딘가에 속박시키기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이 퇴근인사는 조금 다르다. 누나를 속박시킬 순 있겠지만, 오히려 내게는 이 짧은 의례를 통해 일상을 조금 더 가볍게 털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오늘 힘들었어도, 너랑 이렇게 몇 마디 주고받으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어.” 누나가 그렇게 말하진 않더라도, 내가 느끼는 안전감의 근원이 될 수 있으니까.
결국, 내가 바라는 대화란 거창하지 않다. 누나의 “오늘 정말 힘들었어”라는 솔직한 넋두리 한 줄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이에 특별한 온기가 번진다고 느낄 수 있다. 그 온기가 조금 더 확장되어, 둘이 함께 차 한 잔 마시며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온다면 더없이 좋겠다. 언젠가 문득 누나가 내게 먼저 “너 오늘 어땠는데?” 하고 물어줄 때, 그 순간을 나는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아직 그 날이 오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작은 사건이라 여겨질지 몰라도, 일상에서 피어나는 이 사소한 ‘소망’이야말로 덕질러인 내가 누나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다. 좋아하는 사람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 조금 더 솔직해지고 싶은 용기가 쌓여 나갈 때, 관계는 비로소 자신만의 색을 갖게 된다. “결국 사람을 살게 하는 건 아주 사소해 보이는 감정”이라는 문장이 주는 울림처럼, 대화하고 싶다는 나의 작은 소망도 결코 사소하지 않을 것이다.
매일 똑같이 찾아오는 밤이지만, 오늘은 또 다른 기대를 품는다. “수고했어”라는 인사를 건넨 뒤, 돌아서는 누나의 답변이 조금 길게 머무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미묘한 변화 속에서 ‘내가 정말 누나와 대화하고 싶구나’ 하는 마음을 재확인할 수 있으니까. 작고 소박한 인사 한 줄이 쌓여서, 언젠가는 누나와 나 사이에 깊은 이야기가 오갈 날이 오기를. 그게 내가 매일 건네는 퇴근인사에 담긴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