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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를 생각하는 ‘덕질일기’의 한 페이지

2024년 12월 20일

by 양동생

올겨울, 백영옥의 에세이를 읽다가 우연히 “보통 사람들은 각자의 ‘호불호’라는 게 있잖아? 근데 너는 ‘호호호’가 있는 것 같아!”라는 문장을 접했다. 영화감독 윤가은의 에세이 속 한 구절이었는데, 그 솔직하고 엉뚱한 매력에 마음이 끌렸다. 사실 나는 뭐든 잘 웃으며 넘어가는 편이라, 남들이 ‘호불호’를 말할 때 “에이, 그냥 재미있잖아!”라고 대답하곤 한다. 그래서였을까, ‘호호호’라는 표현이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기세를 몰아 윤가은 감독의 글을 따라 읽으며, 영화 얘기나 일상 얘기에 잔뜩 빠져 보았다. 그러다 종종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내 누나다. 너무 좋아하다보니 서로 대화가 많은 편은 아니어도, 불쑥불쑥 누나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어딜 가든, 뭘 읽든, “이거 누나랑도 공유하면 재밌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누나 덕질일기’가 되어버린다.


가령, 영화 얘기만 해도 그렇다. 아녜스 바르다, 켄 로치 같은 감독들의 이름을 보면, 나도 언젠가 누나와 함께 이런 영화를 보며 생각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드라마나 예능을 틀어놓고 도리어 폭소하는 시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니체, 프루스트를 다시 읽고 있다”처럼 근사한 말을 하고 싶다가도, 주말이면 바닥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면서 “아, 누나랑 이런 거 보면서 수다 떨면 재밌겠는데?” 하고 생각한다. 마치 빅맥에 콜라를 원샷하는 기분과도 비슷하다. 내가 좋아하는 걸 누나도 함께 즐기면 어떨까, 하는 작은 바람이 생기는 것이다.


책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얼마 전 김교석의 '아무튼 계속'을 조금 읽게 되었는데, “별다른 능력이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재능. 그것은 성실함이다”라는 문장이 눈에 띄었다. 일상을 단정히 꾸려나가는 사람이 써 내려간 솔직한 에세이였는데,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막 체크인한 호텔방처럼 집안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삶의 습관이라니, 내겐 너무 먼 세계여서 더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또 누나 생각이 났다. 누나가 이 문장을 읽는다면 어떤 감정을 느낄까 궁금해진다. 별 관심 없다는 것을 알지만.


김영민 교수의 '가벼운 고백' 중 “상반기가 속절없이 가버렸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음력이 존재한다” 같은 문장도 떠올렸다. 8월 달력을 넘기다가 “내가 벌써 올해 절반을 훌쩍 넘겼나?” 하고 혼자 뜨끔한 기억이 있다. 이럴 때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대학 가면, 취업하면, 그리고 조금 더 나이 들면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막상 겪어보면 살아보지 않은 나이는 여전히 낯설다. ‘적성을 찾는다는 건 자기가 좋아하는 종류의 괴로움을 찾는 것’이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괜히 치킨엔 맥주, 햄버거엔 감자튀김처럼 이번 겨울엔 에세이와 함께 지내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생각 끝에는 또 누나가 떠오른다. “언젠가 이 문장들을 공유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모든 일상과 취향 이야기는 ‘누나를 향한 작은 덕질일기’ 같은 형태로 모인다. 누나가 뭘 좋아하든, 관심이 있든 없든, 나는 “이거 재미있어 보이는데? 혹시 누나도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애써 찾아본 영화나 책, 예능이 달리 아무 소용이 없더라도, 언젠가 한 번쯤 서로의 취향이 교차하는 지점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 기대감이 나를 또 움직이게 한다.


아직까지는 서로 이렇게까지 취향을 공유하진 않았다. 누나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남들은 ‘호불호’를 말할 때, 나는 “그냥 좋아할 수도 있지!”라고 웃어넘기곤 한다. 내게는 이 ‘호호호’가 누나와 이어질 작은 다리 같다. 내가 몰두하는 것들을 나중에 누군가와 나누는 것, 그 누군가가 곁에서 누나라면 더욱 좋을 것 같아서다.


치킨과 맥주, 햄버거와 감자튀김처럼, 겨울에 어울리는 음식과 드라마, 혹은 책을 찾아보며 나는 계속 누나를 떠올릴 것이다. 이건 어쩌면 어른이 된 뒤에도 계속될, 작고 꾸준한 즐거움이다. ‘덜 익숙한 나이’를 매번 새롭게 건너가는 삶 속에서, ‘호호호’를 키워나가는 건 내게 일종의 비밀스러운 취미이기도 하다. 특히 누나가 내 일상의 한가운데 있다는 걸 떠올릴 때, 그 취미는 더 다정하고 환해지는 것 같다.


결국, 올겨울은 내게 ‘누나를 떠올리는 계절’이다. 윤가은의 글 한 줄에서 시작된 이 작은 일탈이,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덕질의 흔적이 되어 남는다. 누나에 대해 쓰는 이 일기는 현실에선 소박한 독백에 가깝지만, 언젠가 정말로, 내 관심사를 공유하는 날이 온다면 그 순간을 스스로 축하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걸 나누는 일이야말로, ‘호불호’ 대신 ‘호호호’를 실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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