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모메 식당에서 오니기리

<카모메 식당>

by 노란상자

세계지도를 펼친다.

검지를 허공에서 빙빙 돌리다 아무데나 찍는다.

손가락이 착륙한 곳은 핀란드 헬싱키.

그곳에서 마주칠 별별 사람들을 상상하며 익숙한 이곳을 떠나기로 한다.

짐을 쌀 필요는 없다.

여행자의 마음과 비행기 편도 티켓을 예약하면 끝.


헬싱키 공항에 도착해서 막막하다면 일단 600번 버스를 타고 중앙역에서 내린다.

넓고 쾌적한 길을 따라 아카테미넨 서점(Akateeminen Kirjakauppaiska)이 나올 때까지 걷는다.

서점 안으로 들어가 카페 알토(Cafe Aalto)에 앉아 핀란드 여행 책자를 뒤적일 테다.

어쩌면 누군가 다가와 만화 ‘갓챠맨(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가를 물어볼지 모르니까. 누구냐 넌.

다정한 영화 「카모메 식당」을 본 사람이라면 진작에 영화 속 인물 미도리를 떠올렸으리라.

미도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 스스로(자기 손가락이) 선택한 곳으로 무작정 떠나온다.

서점 안 카페에서 책을 보다가 헬싱키에서 막 식당을 개업한 사치에를 만난다.

사치에가 미도리에게 만화 주제가 가사를 묻자 미도리는 완벽하게 적어 준다.

이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만화 주제가를 소리높여 부르는 두 사람이 어떻게 서로의 틈으로 스며들지 궁금하다.


사치에는 느리게 살며 싫은 일은 하지 않는 단단한 사람이고 미도리는 아버지가 정해준 방식대로 살다가 막다른 길에 다다른 사람이다.

사치에는 완전한 독립을 위해 아버지를 떠나고 미도리는 독립할 수밖에 없어서 마침내 일상의 레일을 벗어나기로 한다.

사치에는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핀란드에서 넉넉한 마음으로 식당을 완성해 나가고 미도리는 사치에에게 사는 방식을 배우고 익힌다.


나는 미도리에 가깝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쥐고 산 줄 알았는데 원하는 것에 가까운 상황이 내게로 왔을 뿐이다.

어쩌면 상황이 와서 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인생 책 2부는 진정한 내 이야기로 채우고 싶다.


헬싱키에서의 9월, 길어진 어둠 속 푸른 빛이 내게 줄 장시간의 외로움은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선사할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뜻밖의 만남을 기다리며 헬싱키 항구를 따라 터미널에서 작은 부두까지 돌아다닌다.

잊었던 시장기가 올라와 라빈톨라 카모메(Ravintola Kamome)에 가서 연어 오니기리를 먹는다.

커피는 기본.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식당을 나선다.


이제부터 나는 마사코가 되어 숲으로 간다.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에스포(Espoo)에서 내려 버스로 갈아탄다.

20여 분 달려 눅시오(Nuuksio) 국립 공원에 다다른다.

자작나무와 전나무가 겹겹이 치솟은 고요한 숲에서 버섯을 실컷 딴다.

마사코는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느라 자신에게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고 살았다.

우연히 카모메 식당에 들어온 그녀는 비행기를 갈아타다가 공항에서 가방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되찾은 가방에는 핀란드 숲에서 딴 버섯이 가득하다.

떠나온 곳의 기억은 훌훌 털어버리고 이곳에서 빛나는 버섯으로 가방을 채우리라 기대한다.

항구에서 낯선 이로부터 고양이를 건네받은 마사코는 사치에, 미도리와 함께 당분간 카모메 식당을 꾸려나갈 듯하다.


지금, 여기서, 자신만의 방식대로 현존할 세 사람을 응원한다.

영화에서 사정이 다른 사람들이 기대어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가듯이 나는 노모와 느지막이 한집에 살며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어릴 적에 멋모르고 읽었으나 어려워 다시 읽는 고전문학처럼 낯설다.

모르는 게 참 많아서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아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아주 사적인 감상이지만 노모와 살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


나를 놓치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과 관계를 이어가는 것.


나를 돌보며 타인을 돌보는 일. 나는 엄마와의 관계를 잘 돌볼 때 모든 관계로부터 자유로우며 동시에 세상에 잘 녹아들어 가리라고 믿는다. 지나친 미신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우스펜스키 사원, 헬싱키 대성당을 돌다가 다시 중심가인 에스플라나디 거리를 산책한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아카테미넨 서점 앞이다.

서점으로 들어가 천천히 핀란드어로 쓰인 책들을 훑다가 한 권을 구매해서 카페로 간다.

핀란드 전통 디저트인 코르바푸스티(Korvapuusti), 우리말(?)로는 계피롤과 진한 커피를 주문한다.

계피롤을 굽기 시작하면서 작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핀란드인 손님들이 이끌리듯 들어온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뜻을 알지 못하는 언어를 음미한다.


괜히 덧붙이자면,

카모메 식당을 찍었던 라빈톨라 카모메는 영화에서처럼 지나던 길에 들르면 식사를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영화 덕인지 인기가 너무 많아 예약이 필수다.

2025년 9월 20일에 현재의 식당은 문을 닫을 예정이며 장소를 이전한다고 한다.


이렇듯 내가 겪는 인생은 스크린으로 보는 영화와 조금 다른 결말을 접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해피 앤딩이든, 새드 앤딩이든, 그저 그런 앤딩이든 일단은 멈출 수가 없다.


나흘 후,

런던으로 넘어가기로 한다.

채링 크로스 로드를 걸으며 헬레인 한프가 되리라.

아주 오랜만에 L.A.에 사는 하늘이에게 손편지가 쓰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

성급한 마음이 들어 보이스톡을 먼저 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