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하늘에게
오늘 책 세 권을 택배로 보냈어.
네가 베스트 셀러도 좀 보내라고 해서 요즘 인기 있는 책 두 권과 내가 보내고 싶은 책 한 권을 포장했어.
너에게 주고 싶은 책은 「채링크로스 84번지」야.
꼭, 제일 먼저 읽도록.
여행길에 우연히 들른 시골 책방에서 청록색 표지가 맘에 들어 펼쳐본 책이야.
집에 돌아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한참 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어.
그날 책 맨 뒷장 여백에 네 번이나 메모를 남겼어. 마지막 장을 읽자마자 한 번, 밥 먹으려고 전자레인지 돌리다가 또 한 번, 설거지하다 젖은 손으로 달려가 세 번, 마지막으로 존 던의 시를 베껴 적었어.
한 권의 책이 살아있는 한 사람처럼 느껴졌고 여러 사람이 모여있는 하나의 세상 같기도 했어.
작은 사람과 큰 세상이 어떻게 동시에 하나인 느낌이 들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
책은 뉴욕에 사는 무명작가가 희귀한 고서적을 구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서점, 마크스 상사로 구매요청서를 보내면서 시작해.
'<토요문학평론지>에 실린 귀하의 광고를 보니 절판 서적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하셨더군요.'
책을 읽고 나면 형식일 뿐인 첫 문장이 잔잔하게 흐르는 물결처럼 느껴져.
내 마음이 울렁울렁. 너 지금 코웃음 쳤지? 그래, 내가 좀 과했다.
너는 퇴근 후에 남편 회사 회계 노릇까지 하느라 정신이 없다면서도 곧 장문의 감상문을 보내리라는 걸 알아. 너와 나 사이에 생색은 기본값이니까.
여운을 달래려고 인터넷을 검색했어.
「채링크로스 84번지」는 이미 1986에 영화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어.
영화의 원제는 책과 같은 「84, Charing Cross Road」인데 국내에서는 「84번가의 연인」으로 소개되었어.
국내 영화 제목이 책에서 받았던 감동을 반으로 툭 잘라내는 기분이었어.
번역가 말대로 절실함과 그 절실함을 이해하는 성실함으로 맺어진 관계를 로맨스로 보여주려 하다니.
두 사람 사이를 채운 건 다른 차원의 사랑이야, 라고 못마땅해하며 유튜브에서 영화를 찾아서 봤어.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는 둘의 관계가 연인이든 차원이 다른 사랑이든 상관없었어.
내가 책에서 읽은 세계를 영화에서도 제대로 보여주거든.
영화는 책에 없는 장면으로 시작해.
헬렌 한프가 탄 런던행 비행기가 착륙을 앞두고 있어.
헬렌이 옆자리 남자와 가벼운 대화를 나눠.
남자가 헬렌에게 런던에 온 목적을 묻자, “I’m finishing business(내 일을 마무리하려고요).”라고 대답하지. 그 부분을 몇 번이나 다시 돌려 봤어.
헬렌은 20년 전의 약속을 지키려 마침내 런던에 도착한 거야.
프랭크가 부재한 채링크로스 84번지에 방문하지.
흔적만 남아 있는 서점에 말이야.
장면이 바뀌면서 헬렌이 뉴욕에서 런던으로 처음 말을 걸어.
훗날 서점의 구매 담당자 프랭크에서 시작해서 그의 동료로, 가족으로, 가족의 이웃으로 확장될 바로 그 문장이야.
"토요문학평론지 광고를 보니 절판된 책을 취급하신다고요?"
나는 이 대사가 회복의 문장으로 들려.
절판된 책을 취급한다니 마치 사라지는 것들에 숨을 돌려주는 것 같잖아.
내 멋대로 해석할게.
"토요문학평론지 광고를 보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주신다고요?"
고2 가을이었어. 얼마 전이 추석이었으니까.
집배원 아저씨가 벨을 눌러 인터폰에 대고 말했어.
“우편물 미납요금이 있어요.”
편지를 받았는데 돈을 내라니 영문을 몰랐어.
나가서 대문을 열고 왜요? 왜요?
아저씨가 엽서를 차르륵 아래로 펼쳤어.
보내는 사람 : 하늘 심
받는 사람 : 허씨댁 딸
글자가 빽빽하게 쓰여 있는 엽서 아홉 장.
우표는 달랑 하나.
우표 여덟 개 값을 치르는데 웃음이 배실배실 새어 나오더라.
어이가 없었는데 반가웠고 아홉 개의 직사각형을 채운 내용이 무척 궁금했어.
너와 내가 같은 반이긴 해도 그 정도로 할 말이 많은 사이는 아니었잖아.
네가 교실 가운데 자리에 앉아 날마다 애들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면 나는 교실 뒷문 옆자리에 앉아 애들이 유치하게 논다고 생각했거든.
너는 엽서에 말이 아니라 소설 「어린 왕자」의 구절들로 가득 채워 보냈지.
다른 사람에게는 결코 열어주지 않는 문을 당신에게만 열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당신의 진정한 친구이다.
저기 저 보리밭이 보이지?
나는 빵을 먹지 않아.
그래서 보리는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어
보리밭은 나에게 아무것도 떠올리게 하지 않아.
그게 슬퍼.
그런데 너는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잖아.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참 멋질 거야.
황금빛 보리는 네 생각이 나게 해줄 테니까.
그러면 나는 바람에 이는 보리 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
나도 너를 따라서 여러 장의 엽서에 무언가 적어 답장을 했어.
직사각형의 변을 따라 누군가의 시를 적고 안에는 고마운 마음과 헛소리로 채웠지.
물론, 나는 우표를 전부 붙여서 보냈잖아.
그것마저 너처럼 할까 하다가 참았다.
어느 날 문득 우푯값 미납 사건에 대해 너에게 얘기했을 때 너는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고개를 젖히고 시원하게 웃었어. 그때는 이미 하루에도 몇 번씩 쪽지를 주고받고 집에 가서는 열여덟의 고민과 상념을 긴 편지로 보내던 사이였지.
학년이 끝날 즈음에는 나도 유치한 애들 사이에서 네 이야기를 들었지.
나는 네게서 따뜻하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법을 배웠고 너는 내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아무튼 우리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도 여전히 시간을 공유하고 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헬렌이 마크스 상사로 직선으로 보낸 편지는 프랭크에게 닿고 그와 헬렌의 생활 속 사람들과 이어져 동그라미가 돼.
프랭크 도엘이 세상을 떠나고 서점은 폐업했어도 헬렌은 프랭크의 가족과 계속 교류하며 관계를 이어가.
마침내 구가 되었지.
아마 그래서 사람이 한세상으로 보였나 봐.
바쁜데도 불구하고 답장을 쓸 하늘아, 내 마지막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어.
다만 책을 다 읽은 후에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 궁금해.
책과 영화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해 둘게.
네가 답장에 쓸 이야기를 남겨 두어야 하니까.
마지막으로 헬렌이 좋아하는 존 던의 시로 편지를 마무리하려고 해.
헬렌처럼 안락의자에 편히 앉아 코렐리의 조용한 바이올린 연주를 들어도 좋겠어.
그리고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 거야. 우리 사이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들도 들을 수 있도록 말이야.
사랑을 담아
노란 씀
모든 인류는
한 권의 책과 같아서
한 사람이 죽었다고
그 장 전체가 없어지지 않고
다만 더 훌륭한 문장으로
가꾸어질 뿐이다.
모든 문장이 훌륭히 다듬어져야 하므로
하느님은 여러 감수자를 두셨다.
오래되거나 좋지 않아서
바뀌는 문장도 있고
전쟁이나 법 때문에
바뀌는 문장들도 있었다.
하느님이 흩어져 있는 책장들을 거두시니
모든 책이 그분의 서재로 모이게 될 것이다.
존 던 (16~17 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