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나날 겨울 편
빨간 털부츠를 신으려면 엄지발가락을 오므려야 한다. 장화에 발을 넣기 전에는 깜빡 잊기 일쑤다. 발뒤꿈치가 장화 목에 걸려 탁탁, 바닥에 신발 뒤축을 친다. 작년에 산 방한 부츠는 예쁘기도 하지만 정말 따듯하다. 내 발이 조금만 천천히 커졌다면 좋을 텐데.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이다. 방학 숙제를 거의 다 하고 딱 하나, 현장 체험 학습 보고서만 남았다. 집에서 과학관에 가려면 중간에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한 시간 반은 가야 한다. 날은 춥고 돈도 없고 아무래도 과학관 방문 보고서는 쓰지 못할 듯하다. 방학 숙제를 다 했냐고 묻는 엄마에게 빠짐없이 다 했다고 말한다.
기숙학교에 다니던 오빠는 방학인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학교 근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 식구는 각자가 두 다리로 버티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숙제 정도는 나도 혼자 챙겨야 했는데 고민이 되었다. 결국 오빠한테 편지를 썼다.
오빠, 감기 걸리지 않게 몸조심해. 엄마와 나는 잘 지내. 엄마가 흰둥이를 고물상에 팔았어. 아무래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오빠, 과학관 가본 적 있어?
편지를 보냈더니 다음 주에 경찰복 같은 교복을 입고 오빠가 집에 왔다.
과학관에 가자.
오빠가 멋지게 말했다. 곁에 있는 엄마도 모르는 내 마음을 오빠는 멀리서도 알아들었다.
과학관은 서울 어린이 대공원 안에 있다.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 숙제도 하고 신나는 놀이기구도 타고. 오, 예!
과학관 내부는 밝고 천장이 높았다. 어느 코너를 먼저 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렸다. 눈에 띄는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며 돌아다니다 왜곡 거울 앞에 멈춰 섰다. 몸이 길어지다가 옆으로 퍼졌다. 되돌아가서 빛의 반사와 굴절에 대한 설명이 적힌 안내판을 보고 공책에 베껴 적었다. 마음은 벌써 밖에 나가 있었다.
오빠는 나를 과학관 뒤편에 있는 놀이터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뺑뺑이와 쇠로 된 큰 공이 매달려 있는 그네가 있었다. 나는 다리를 쫙 벌려 쇠공을 껴안고 줄에 매달렸다. 앗, 차가워. 한기가 스웨터를 뚫고 들어왔다. 아랑곳하지 않고 커다란 구가 흔들렸다. 경계를 나눈 것처럼 높고 길게 늘어선 소나무담장 너머로 관람차가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맞다. 놀이공원은 영어로 어뮤즈먼트파크(amusement park)지. 내가 처음에 말한 대로 우리는 플레이그라운드(playground)에서 놀았다.
나는 뺑뺑이에 올라갔고 오빠가 무지무지 빠르게 돌렸다. 속도가 하도 빨라서 바람이 회초리처럼 얼굴에 찰싹였다. 어찌나 얼굴이 따갑던지 웃겨서 나는 까르륵거렸다. 오빠도 그런 날 보고 웃겨 죽겠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더 빨리 달렸다. 그러다 오빠가 발을 헛디뎠는지 빙판에 미끄러졌다. 속도가 느려진 뺑뺑이에서 내려오다가 나도 미끄러졌다. 간신히 일어난 오빠를 붙잡는 바람에 같이 또 넘어졌다. 우리는 바닥에서 뒹굴며 웃었다. 입이 얼어서 다물기도 힘들었다.
그날 집에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군자교를 건너야 했는데 오빠와 나 말고도 알록달록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다리를 건넜다. 내가 지금 그날의 공간을 말로 다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리를 건너며 본 하늘과 저 먼 대기, 사람들이 도형을 깨뜨리며 걸어가던 것, 언 강물 밑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때의 내 기분과 오빠의 기분. 간신히 분절된 언어를 빌어 나열해 본다. 말의 틈새로 통과한 공기의 흐름은 그저 감각할 뿐이다.
영화 「여행과 나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며 이날이 떠오른 건 맥락이 없다. 설원을 뒤뚱거리며 걸어가는 각본가 ‘이’와 한 어린이가 다리를 절룩이며 눈이 꽝꽝 얼어붙은 군자교를 건너는 모습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일상의 문을 열고 낯선 시간을 통과한 것? 아무튼 겨울이고 하얗고 걷는다.
그날 내가 머릿속에 그려 둔 지도에 우리가 뒹굴던 놀이터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영화에서 말에 갇혔다고 말하는 ‘이’가 지도에서 벗어난 장소에서 바람을 만났듯이 나도 계획에 없던 곳에서 숙제를 마치는 일보다 더 살아있는 경험을 했다.
훗날 오빠가 대학 졸업 후 직장에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제일 먼저 내 발가락이 떠올랐다고 한다. 덕분에 꽤나 좋은 구두를 선물 받았다. 대공원에 다녀온 날 나는 계속 웃으면서 잠들었는데 오빠는 눈물이 났다고 했다. 내 발가락들이 벌겋게 부어올랐고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시커멓게 멍들어 있었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