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어떻게 선전하느냐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치의 결성과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은 카이사르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카이사르를 신격화하는 것이었다. 비록 카이사르의 몸은 죽었으나, 그의 영혼은 로마를 돌보는 신이 되었다며 그를 '신성한 율리우스'라고 칭하도록 한 것이다. 카이사르의 신격화의 최대 수혜자는 당연히 옥타비아누스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연스럽게 자신을 '신의 아들'로 선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로마를 만들었고, 로마는 역사가 되었다>, 김덕수
'나는 누구인가?'의 답은 2가지 관점에서 정의된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나의 정의는 자아의 정의, 가치 측면에서 볼 수 있는 데, 이는 스스로 정의한 '나'의 모습과 타인이 바라본 '나'의 모습으로부터 완성된다고 본다.
스스로가 아무리 능력있고 혹은 타인에게 좋은 사람으로서 영향을 미친다고 정의한 들, 타인이 '나'를 그렇게 바라봐주지 않는다면, 결국 공허한 메아리이자, 허무맹랑한 말을 뱉는 사람에 불과한 사람이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스스로는 신의 아들로 프레이밍하기 위해 자신의 양아버지를 신으로 만드는 선택을 했다.
더 나아가 이 모습을 '선전'했다.
나 스스로 정의한 모습을 스스로 정의한 것을 넘어, 타인으로부터도 동일한 모습으로 보이기 위한 장치를 마련한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하는 지도 물론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옥타비아누스처럼, 타인에게도 정의한 내 모습이 프레이밍할 수 있는 가에 있다.
이는 실질적인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장치적으로 그 이상을 발휘할 수도 있다.
(때에 따라서는 그 능력도 중요하지 않을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스스로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회사에서 전략실에 있다던가, 아니면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받는다고 하며, 보좌를 하는 역할을 한다고 자처해보자.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그것이 프레이밍의 일환은 아닐까.
이미 오래전, 우리가 누구에게도 표를 팔지 않게 되었을 때, 인민은 의무감을 내던졌다. 왜냐하면 한때 임페리움, 파스케스, 군단, 모든 걸 부여하곤 했던 인민이, 지금은 제 자신만 생각하고, 더욱이 단 두 가지의 것(빵과 전차 경기에)만 현안이 되어 바라고 있으니까 <풍자시집 중 일부>, 유베날리스
때에 따라서는 구성원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도 있다.
적절한 빵과 서커스는 그들의 관심을 돌리며, 결정권자가 고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주기도 한다.
물론, 그 시간이 길어진다면 악영향이 될 것이긴 말이다.
그는 친구들에게 인생이라는 소극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분히 잘해낸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연극의 맺음말로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그동안 즐거웠다면 부디 따뜻한 작별인사로 여러분의 감사를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를 고민해본 적은 없다.
때로는 끝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럼에도, 마지막이 있다면 나는 어떤 역할과 행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을까.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사회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아쉬움으로 남지 않을까.
하고 싶을 것을 하지 못한 아쉬움보다 하지 말야할 할 것을 하는 후회를 덜 하기 위한 노력이 때로는 하고싶은 것 마저 움츠르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