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탈고시촌

브런치는 탈고시촌이다.

by 오뚝이


고시촌 사람들은 고시촌스럽지 않은 카페, 밥집을 가면 으레 '여기는 탈고시촌 같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고시촌스러운 것은 뭐냐고?


담배꽁초가 가득한 거리,

저렴한 가격,

무채색,

사람을 전혀 개의치 않고 쌩쌩 달리는 오토바이와 자동차들,

피곤함,

떡진 머리,

거북이 등껍질처럼 거대한 가방을 메고 종종걸음으로 걷는 학생,

주변에 사람이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폐지 줍는 어르신들,

책을 보면서 걷는 학생,

아침 일찍 젖은 머리로 학원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 등등..

고시촌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탈고시촌'은 마치 더현대백화점이나 스타필드에 처음 갔을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깨끗하고, 쾌적하고, 반짝반짝하고, 여유롭고, 친절하고, 따뜻하고…


내게 어쩌면 브런치는 '탈고시촌'같은 공간인 거 같다는 생각을 한다.


브런치에 들어오면 일단 마음이 따뜻해진다.

작가이자 구독자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글에 대한 존중이 있다.

워낙 읽는 것을 좋아하고, 쓰는 것을 좋아하니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것이겠지.


브런치를 시작한 초기에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다시 공부로 돌아가려면 공부모드로 리셋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브런치에서의 나는 한없이 말랑말랑하다.

말랑말랑한 마음으로는 공부하기가 어렵다.


처음 로스쿨에 들어갔을 때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지나치게 감수성이 풍부한 것이 나의 최대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습게도 당시 음악을 듣지 않았다.

평생에 걸쳐 들어왔다고 할 수 있는 음악을 의도적으로 듣지 않았다. 감성에 빠지는 것이 싫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니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나는 언제나 뒤처졌다.

중간이라도 가면 잘한 것이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온 사람, 노무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 로스쿨 입학 전에 선행학습을 빡세게 하고 들어온 사람, 법대를 나온 사람 등등..

그들의 틈에서 학부 때 법학 과목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은, 일을 하다가 뒤늦게 법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다른 사람보다 열정적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열정이 공부와는 이어지지 않았다.


로스쿨 1학년 여름방학.

남들은 1학년 2학기 선행학습으로 바쁜 시기에

나는 한 공익변호사단체에서 주관하는 인권 관련 캠프에 갔다.

로스쿨에 들어간 지 1학기 만에 녹초가 되어 로스쿨에 왜 입학했는지를 잊어버렸을 정도여서 초심을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캠프에서 나만 로스쿨생이었고, 나머지는 다 로스쿨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었다.

그중에는 정말로 인권 등에 관심이 지대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로스쿨 입시에 스펙을 만들기 위해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난 그곳에서 유일한 로스쿨생이었음에도 그들 사이에서 주눅이 들어있었다.


어쩌다가 내가 로스쿨생임을 알게 된 관계자는 자신의 로스쿨 당시의 경험담을 얘기해 주며 내게 공익 쪽으로 가고 싶다는 열정을 죽이고 공부를 하라고 했다. 오히려 그 열정이 공부에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관계자는 자신은 로스쿨 시절에 오로지 합격 하나만을 목표로 공부했다고 했다.

자신의 동기들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쟤가 공익 쪽으로 갔다고?’ 할 정도로 학교 행사나 학회 등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오로지 독하게 공부만 했다고 했다.


나도 그랬어야 했다.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만 자꾸만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일단 합격을 해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텐데..

머리로는 아는데 잘 실천이 안 되고 있는 거 같다.

자꾸만 내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브런치를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그저 이 시간이 얼른 지나가버리면 좋겠다.


@가르멜 수녀원, 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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