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할머니가 될 거야.
키다리 아저씨. 살면서 한 번은 만나고 싶은, 남몰래 나를 위해주고, 응원해 주고, 묵묵히 지켜봐 주는 사람.
오늘 키다리 아저씨와 점심을 먹었다. 나의 아버지와 동갑이시고 많은 분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어른이시다. 나는 그분을 ‘삼촌’이라 부른다. 캄보디아가 맺어준 인연이다. (삼촌과는 캄보디아에 있는 ‘Banteay Prieb’이라고 하는 장애인직업기술센터에서 활동가로써 처음 만났다.)
4번째 시험을 떨어지고 학원 개강 일정에 맞춰 다시 고시촌으로 떠나기 전날 삼촌이 응원차 고기를 사주셨다. 그러면서 힘들 때 연락하라고,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하셨다. 그때 나는 농담으로 맥주라고 연락하면 조금 힘든 거고 소주라고 연락하면 많이 힘든 것이니 그때 만나서 맛난 거 사주세요~라고 했다. 사실 그냥 하시는 말인 줄 알았다. 이미 고시촌으로 떠나기 전에 충분히 응원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넘치게 감사했기 때문이다.
우울이 깊어진 7월에 삼촌에게서 연락이 왔다. 몸보신하게 밥 먹자고. 사실 그때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나만의 동굴에서 끙끙대던 때여서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삼촌을 만나는 게 혼자 앓는 것보다 좋을 거 같아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만나는 줄 알았는데 삼촌은 네게 해줄 말이 있다며 단 둘이 만나자고 하셨다. 그때는 우울에 정신을 못 차릴 때라 내가 지금 정신 빠져서 공부에 집중을 못하고 있는 걸 알고 혼내시려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그럴 분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찔린 것이다.).
삼촌과 만난 날은 다행히 평소처럼 무덥지 않았다. 삼촌은 내가 있는 고시촌에서 가까운 서울대입구역까지 와주셨다. 삼촌과 솥뚜껑에 구워주는 삼겹살을 먹고 볶음밥까지 야무지게 먹으면서 한 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눴다.
신기했다. 내가 아는 아저씨들은 대부분 대화가 아닌 독백을 하거나 라떼를 시전 하거나 호구조사를 하였는데(일반화 하는거 아님. 내가 만난 아저씨들 한정). 삼촌과 나는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공부 얘기, 캄보디아 얘기 등을 하였다. 대화 중간중간에 찾아온 정적들도 대화의 일부분 같았다. 애써 정적을 채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됐다.
삼촌은 자신의 오랜 친구 중에 변호사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고시공부를 할 시절에 다른 친구들에게 가르칠 정도로 뛰어났음에도 계속 불합격하다가 아주 늦게서야 합격을 하였다고 하시며 그 친구가 분석한 자신의 문제점은 아는 것은 많으나 그것을 주어진 시간 내에 현출 하는 순발력이 부족해서였다는 것이다. 나도 오랜 시간 공부를 하여서 아는 것이 많겠지만(사실 공부하다 보면 아직도 생소한 게 나온다.. 껄껄.. ) 순발력을 길러야 한다고 하셨다.
순발력을 어떻게 기르냐? 산책을 하며 머릿속으로 문제를 푸는 거라고 하셨다. 산책을 하면서 잡생각을 하기보다는 그날 내가 공부한 부분을 복기하고 내 나름의 목차를 머릿속에 구조화하여 계속 떠올려보는 연습을 하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머리를 쓰기 싫어서 대충 손으로 쓰며 암기를 하고 그냥 치워버리곤 했는데 머리로 판례의 논리를 따라가며 외우는 것은 잘하지 않았었다(확실히 머리를 굴려서 공부한 부분의 사실관계와 법리, 중요 키워드 등을 떠올리며 암기하는 방법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내가 하고 있던 것은 그냥 머리에 집어넣기 바쁜 무지성 암기였던 것, 머리가 아파와야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삼촌이 러프하게 말씀하셨지만 지금 나의 나태한 공부방법을 탈피할 최적의 조언이었다. 산책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최적의 방법.
삼촌은 봉투에 소중하게 담긴 용돈을 내게 주시며 약소하다고, 꼭 밥 먹는데만 쓰라고 하셨다. 나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시고, 이미 밥도 여러 번 사주신 것으로 넘치게 감사한데 전혀 약소하지 않은 돈을 주셨다.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오늘 나는 결심했다. 삼촌 같은 어른이 되기로. 그냥 나이가 많아서 어른인 어른 말고 진짜 어른이 될 거다. 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며 내가 가진 것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70살이 될 때까지 나는 나의 삶을 마치 정성 들여 가꿔놓은 정원처럼 열심히, 아름답게, 선하게, 젊게 가꿀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굴에 나타난다던데 삼촌처럼 인상 좋은 멋있는 할머니가 돼야지! (신세대 용어도 많이 아는 힙한 할머니! 신세대라는 표현에서 이미 노잼느낌이 나네.. 껄껄)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 나는 오랜 시간 공부를 하며 낡고 지쳤는데,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 응원해 준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꼭 합격할 것이다. 그리고… 답답한 마음에 이곳에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제 글을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구독, 라이크, 댓글 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 너무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