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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스나씨 Oct 28. 2020

대장놀이 꼬마가 상담사를 하겠대.

H성인상담2기_다문화상담_중간보고서

[Part.1] 나의 문화적 배경은 나의 발달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

나의 과거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보통의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흔히 이야기하는 ‘다문화’의 반대편에 있는-대다수의 사람들이 속해있는 그런 문화에서 크게 벗어난 적은 없었다. 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에서 살고 한국어를 사용하며 한국 음식을 먹고 자랐으며, 부모님이 건재하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지도 않았다. 결국 나의 발달과정에 이렇게 평범한 나의 문화적 배경은 다른 이들과 크게 꼬집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없지 싶어서 ‘문화’에 대한 개념을 조금 좁혀보기로 했다. 어린 시절 나를 품고 있었던 또래문화에 대해서. 그 안에서 나는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는지를 떠올려보며 글을 작성해보기로 한다.




첫 째라서 책임감이 강해 보여서 그랬던 모양인지, 아니면 남들보다는 조금은 빨랐던 성장속도 때문이었는지 어릴 때부터 곧잘 임원을 많이 했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어린아이 같지 않았던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9살 때 아파트 계단에서 심하게 굴렀던 적이 있었는데, 우당탕탕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당시 2층에 살던 아주머니가 나와보셨는데도 난 울기는커녕 뼈가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아프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니·오빠가 없어 물어볼 것이 없었던 나는 ‘전과’가 너무 가지고 싶었지만 스스로 해야한다는 생각에 엄마를 감히 조르지 못했다. 전에 살던 동네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해서 10살때부터 곧잘 수십킬로 떨어져있는 곳에 버스를 타고 혼자 찾아갔다는 것, 혹은 걸어갔던것, 그것도 전혀 연관도 없는 어떤 친구까지 끌고 가곤 했었다는 것을 엄마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리고 초등학교 때 한 선생님이 내게 적어주었던 롤링페이퍼. 첫 마디가  ‘어른스러운 아이야!’ 였던 것도 생각이 난다. 뭐 나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어른스럽게 굴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눈치가 좀 빨라 학교 성적이 좋았던 것 같고, 어쩌다 보니 목소리가 커서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이 되어버렸고, 어쩌다 보니 신체발달이 다른 아이들보다는 빨라 운동을 잘 하는 것처럼 보였고, 그리고 선생님께 칭찬받기 위해 학교생활을 하다 보니 팔방미인 모범생이 되어있었다. 이런 것들이 모여 날 지속적으로 임원을 하게 만들었고 한번 하다보니 그게 두 번이 되고 다시 그게 세 번이 되고, 결국 나의 이미지는 그런 식으로 굳어져 버렸다. 임원을 곧잘 하다 보니 친구들 사이, 즉 또래집단 사이에서도 리더역할을 많이 하게 되었다. 꼭 학급 안에서 어린이 회의를 진행하는 것 뿐만 아니라 수업을 마친 후의 친구들과의 생활에서도 주도해서 어딘가를 놀러간다거나, 무엇을 하며 논다거나 하는 일을 정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나의 적응력에 감탄을 해 마지않는 것 중의 하나가 고등학교때 까지도 리더를 했다는 것. 나는 학생 대부분이 교문을 같이 쓰는 바로 뒷건물인 ㅇㅇ여중에서 진학하는 ㅇㅇ여고에 다녔다. 당시 ㅇㅇ여고에 진학한 나와 같은 중학교 동창생은 딱 2명, 한마디로 중학교때부터 서로 알고지내던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그 와중에 나는 어쩌자고 그들을 끌고 나갈 수 있었던 건지. 물론 처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학교에 갈 때마다 나는 전학생인것 같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냥 있으면 자연스럽게 모여들던 친구들이 없어서 처음에는 친구사귀는 법을 몰라 당황했었다. 그러던 내가 또래집단의 중심에 오기까지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선생님들도 나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사실 이런 기미는 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터 있었다. 당시 속셈학원을 다녔던 일곱살짜리 꼬마아이는 선생님들처럼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내 기준에서 나쁜행동을 하는 친구들에게 손바닥을 내밀라고 시켰고 실제 때리곤 했다. 순순히 손을 내어주던 그 아이들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것인지. 많은 이벤트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5학년때 선생님이 참 나한테 희안한 것을 시키셨던것. 반 친구들을 상대로 내게 하루의 시간을 주셨고 난 그때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까지 했다.  아마 상하반기 두 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남자애들 여장시켜서 순위매기는 거랑 반애들 이름맞추는 스피드게임 등등 이걸 어찌 생각해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다. 생각해보니 나 그때 스스로 대본도 썼다. 정말 간질간질한 대사들을 섞어서. 뭐 요샛말로 거의 예능프로그램을 제작한거나 다를바 없네. 원래 사진 첨부 이런거 안하려고 했는데.. 하.. 안할수가 없다ㅋㅋㅋㅋㅋ


이것봐 대본 있잖아 ㅠ_ ㅠ 이걸 보관하고 있을줄은 몰랐어 ㅠ_ ㅠ



내친김에 한장 더. 팀 구성표(나름 고민 많이했었음)+저렇게 많은 프로그램이 있었네;



  중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갑자기 반장을 시켰다. 원래 1학년 1학기때는 선생님이 반장을 정한다고, 그리고 우리반은 1등이 아닌 나를 반장으로 정했다고. 이것은 지금 생각해도 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어찌 평가하고 그리 정하셨던 건지. 그냥 그 당신의 또래집단의 특성이 그랬던 것 같다. 나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한번 반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되면 그게 꼬리표처럼 계속 따라다닌다는 것. 이미지가 굳어져버려서 그 다음연도에도, 또 그 다음연도에도 하게되는 경우가 많았다(심지어 나는 누구들처럼 당선되고나서 반에 햄버거를 뿌린적도 없는데 희안함). 반장선거때마다 추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구조. 누군가 앞장서서 그런 그들을 끌고 나갔고 그게 당연했다. 물론 맨날 하던 반장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건 작년 다른 반 반장과 맞붙는 경우. 이건 뭐 어쩔수 없지. 그렇게 그들의 기대에 따라 점점 나는 대장놀이를 즐겼고 그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뭐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한 다는 것은 내게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나중에 철이 들고나면 친구들은 나에 대해 너무 지 맘대로만 하는 이기적인 아이였다고 평가를 내릴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 먼훗날 사실을 알게 되는 나는 충격을 먹을 수도 있겠지.


그냥 그때 내가 아니, 우리가 속해있던 문화가 그랬다. 어딘가에 소속되어있어야 한다는 의무감. 그리고 그를 이끌어 가는 한 사람. 실제 이러한 개념은 내가 학창시절을 마감하고 나서 사회적으로 '왕따'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심해졌다. 아이들에게 스스로 맡겼던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한다' 라는 숙제는 이제 부모들도 함께 해야하는 숙제가 되었다. 어린이집-유치원-초등학교로 이어지는 친구관계 형성, 혹은 엄마 무리의 형성에 부담을 가지고 완전 다른 동네로 이사를 하지 못하는 지인들도 더러 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이런 소속감의 문화에 필수적인 개념이 그 모임의 리더이다. 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 뭐 관심을 받는 것이 싫지도 않았고 나중으로 갈 수록 그냥 당연한 일이 되어버렸던지라, 그리고 점점 즐겼던 지라, 그래서 왠지 반장선거날이 기다려지기도 할 정도였으니까. 고등학교 2학년때의 반장선거 때의 분위기가 갑자기 생각이 났다. 공약이나 기타등등 하고싶은 말을 하라는 소리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기 싫으니 간단히 말하겠습니다. 시켜주면 잘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치니 아이들이 소리를 질렀다. 앞의 아이들처럼 혹은 뒤의 아이들처럼 틀에 박힌 유세멘트는 하기 싫었다. 쿨한 리더가 되고 싶었다. 앞장서서 만우절에 선생님들한테 장난도 치고, 옳지 않은 주장을 하는 선생님이 있으면 반항도 해보고, 가끔은 학교 앞 노래방으로 땡땡이 치는 것도 주도하는 반장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했고 결국 오땡땡이라는 명예로운 별명도 얻었다. 나도 그런 내가 진심 싫지 않았고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다들 고3이 힘들다는데 난 별로 그런것도 없었다. 내신성적보다 잘 나오던 모의고사성적이 있어서 어찌어찌 공부로도 명함은 내밀 수 있었다. 뭐 덕분에 또 다른 그룹이 생겨서 친구가 늘어났다. 수능심화반.


뭔가 또 중심내용에서 벗어난 것 처럼 되어버렸는데, 결론적으로 이러한 환경이 내 발달과정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환경이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본래 소심한 성격을 타고 났던 내가 환경으로 인해 나서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라는 것은 일단 뒤로하고, 언급하고자 하는 것은, 철저히 리더역할을 수행해오던 내가 '얕고 넓은 관계'를 참 즐겨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고 만나야 되는 사람들도 참 많았다. 하고 싶은 것들, 해야하는 것들도 참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더는 모두에게 공평해야 했다. 한 사람에게만 얷매여서는 안 되었다. 그래서 이런 나의 성향으로 인해 상처받았던 친구들도 좀 있었다. 원래 그 나이때 어떤 어린아이들은 그런 특성을 가진다. 좋아하는 친구가 있으면 본인만 독점하고 싶고 좋아하는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노는 것을 심하게 싫어하는. 하지만 나는 욕심이 참으로 많은 아이었다. 최대한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싶었고 그게 좋으니 실제 그렇게 행동을 했다. A는 쉬는시간에 같이 노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친하고, B는 집에 갈때 항상 같이 가는 친구중에서 가장 친하고, C는 나와 편지를 주고 받는 친구중에서 가장 친하고, D는 공부를 하거나 시험기간때 가장 친하고, E는 특별활동 시간에 같은 부에서 가장 친하고, F는 방과 후에 발야구나 피구 반 대항경기를 함께 뛸때 가장 친하고, G는 전교어린이회의에 함께 참석하는 친구중에서 가장 친하고, H는 '나우누리'라는 PC통신을 같이 하는 친구들 중에 가장 친하고, I는 만화책을 좋아하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친하고. 뭐 이런 식이었다.


나의 이 바람끼많은 행동에 대해 비판하며, 본인에게만 집중하기를 호소하고, 결국 그게 되지 않으니 이제는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편지들도 누군가들에게 꽤 받았다. 사실 상처입은 것이 보였지만 어린 나는 내 행동에 대해 후회한다거나 그런 그녀들에게 결코 미안하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같다. 그저 'ㅇㅇ할때 제일 친한'친구를 하나 잃었다는 데에서 속상하다고 느껴졌을 뿐. 죄책감은 전혀 들지 않았다. 


 무리에서 한 친구만을 독점하려하며, 단둘이 있고 싶어하는 어떤 친구를 미워한 적도 있었다. 일곱명이 함께 모여서 놀면 좋은데, 유독 어떤 한 친구와만 진한 관계가 되어가는 것을 보며 무진장 답답했었다. 그 진한관계가 내가 아니라서 속상했던 것이 아니다. 백번 양보하더라도 2+5=7까지는 인정이 가능한데 그냥 2가 떨어져나가서 5와 갈라지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무리안으로 끌고 들어오기위해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일부러 7명이 놀러가는 이벤트들을 자주 기획했던 것은 물론이고 7명의 별칭, 예를 들면 이름앞에 '왕'자를 붙여서 서로를 부르며 우리는 2와 5가 아닌 2+5=7을 강조하기 위해 발버둥쳤다. 이렇게 행동했던 것도 서로 깊은 관계의 2가 부러워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냥 친구 2명이 사라져 가는 것이 싫어서였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항상 바랬던 작은 소망, 내가 속한 다른 그룹의 친한 사람들이 모두 함께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 그래서 어떤 그룹의 모임에 다른 그룹의 누군가를 부르기도 하고 내가 부른 그를 위해, 그 그룹에 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참으로 배려를 많이 했었던 경험이 많다. 서로 다른 그룹의 그들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감대를 찾아 준다거나, 1의 연관성만 있어도 일부러 주제로 꽂아주고는 대화를 이어가게 한다거나 하는 일들. 이게 그냥 단순하게 사람이 좋아서 하는 행동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을 많나는 것을 격하게 좋아하는 나는 앞으로는 2번 만날 것을 1번에, 일명 1타2피로 그들과의 만남을 해결하고, 또 다른 제3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았던 것이리라. 그리고 항상 꿈꾸었다. 나를 아는 모든사람들이 한날 한시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은 언제일지. 어렸기에 감히 결혼식 혹은 장례식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그저 파티같은 것을 열어서, 그것도 주기적으로 열어서 '다 같이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참으로 많이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화려했던 10대가 점점 마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수능날 별똥별이 떨어진다는 소리에 교복차림으로 호수공원에서 밤을 새우고는 그 다음날 집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어제꼈던 기억. 그렇게 날 믿어주던 담임선생님에게 재수를 한다 했더니 극구 반대하며 소신지원을 하라는 말에 울컥해서 대판 싸웠던 기억. 그리고 기억의 공간에 넣어두는 것이 도저히 허락이 되지 않았던 것인지 고등학교 졸업식이 어땠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 사진은 찍었던 건가? 앨범을 뒤져보면 나오던가? 아닌데 못 본것 같은데.  아니 아예 학교를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냥 이대에서 친구들과 KFC에서 치킨먹고 지하에 있는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 집에갔을 지도 모른다. 담임선생님이랑도 싸웠는데 구태여 불편한 자리에 애써서 갔을리가? 와 쓰다보면 기억이 날 줄 알았는데 정말 그냥 캄캄하다. 나 고등학교 졸업식에 갔었나?


그렇게 학창시절 내내 끝이 어딘지도 모를정도 치솟던 자신감재수생활을 하며 더 급격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환경이 급변했다. 일단 소위 어린시절부터 소위 천재소리 듣고 자랐던 나의 진학이 실패하자 실망하던 부모님의 시선이 변했음이 느껴졌다. 항상 내 주변에 있었던 친구들은 하나둘 대학에 진학하여 그들만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음주'문화에 젖어갔던 우리들. 하지만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했다. 일단 '술자리'라는 경험이 전무했다. 2000년의 그때에는 다모임과 아이러브스쿨이 아주 인기였다. 자연스럽게 동창회가 결성되고 모임에도 나갔다. 술을 마시는, 아니 즐기는 동창생들을 보며 괴리감을 느꼈다. 각종 게임들을 하며 어쩔수 없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술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시고는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 그렇게 좋아했던 동창생에게 업혀가면서도 기분이 너무 더러웠다. 왜 이런 내게 술을 이렇게 먹였는지 너무 혐오스러웠다. 그들과 그리 즐겁게 놀았던 기억은 없다. 이후에도 몇번 동창회에 참석하긴 했던 것 같은데 고등학교 졸업식처럼 이것 역시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잊어버린 것인지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은 휴면상태에 들어가있었던, 이미 망한 초등학교 다음카페에 들어가보고서야 깨달았다. 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던 내게 큰 변화가 생겼던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재수생활을 잠시 학원에서 했었는데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메인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한명과만 친하게 지냈다. 그녀가 학원에 나오지 않는 날이면 진심으로 점심시간이 상당히 걱정되었다. 그 밖에 주변에 당시 남아서 자주 보던 친구들은 함께 재수를 하는 친구들 몇 명, 그리고 동네에 살아서 거의 매일 보는 것이 가능했던 친구 한명만 주로 만났다. 인간관계가 상당히 좁아짐을 느꼈다.


대학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애초에 내가 꿈꾸며 생각하던 학교도 아니었고, 특히 합격을 하고 처음 사람들을 만났던 OT. 단체 버스가 출발하기 전, 잠시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 동기들 두명을 따라나섰더니 구석진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둘다 담배를 빼어무는 것을 보며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이 싹 사라져버렸다. 나보다 어린 현역의 01학번들에게 호칭을 뺀 이름이 불리워지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첫 수업이 있던 날, 나와 같이 재수경험이 있는 동갑내기 두 명을 첫 수업때 찾아냈고 과 생활은 그 둘과만 함께했다. 술자리가 싫었으니 과에서 하는 행사에는 핑계를 대며 빠지는 것이 당연했고 그리고 우연한 계기에 시작된 학교 밴드생활 덕분에 과에서는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 밴드가 좋았던 것은 그곳 동기생들 역시 전부 나와 같은 재수생이었다는 것. 마찬가지로 호칭을 뺀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연습이 끝나면 밤 10시가 훌쩍 넘었던 까닭에 술자리가 거의 없었다는 것. 그렇게 소규모의 집단생활에 익숙해졌다. 때마침 여자친구가 생겨 그녀들에게 집중하던 같은 과 친구들의 빈자리를 그렇게 동아리가 채워주었다. 동아리에서도 뭐 감히 중심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철저히 능력 중심으로 돌아가던 조직의 생리덕분에 수업도 빠지고 집에도 안가고 동아리방에 죽치고 있는 선배들이 중심이 될 수 있었으므로, 사실 그것을 한심해 마지않던 차였으므로 나는 중심에 있기를 아주 당연히 포기했었다. 그리고 나랑 동갑이었던 바로 윗 기수선배에게 언니오빠 하는건 정말이지 닭살이었다. 바로 윗윗기수 3학년 역시 참 신기하게도 너무나도 가관이었던 것이, 빠른 연도생이었던 관계로 나와 동갑이었다는 것. 그냥 동갑인데 다 말트고 야야하면 될것을 뭐 그리 따지고 언니오빠라고 불러야 함? 동기들과는 달리 나의 경우 절대 오빠라고 부른 적은 없다. 회장님 내지는 호칭을 생략하는 형식으로 어떻게든 그 호칭들만은 피했다. 이러니 뭐 친해질 수 있었을까? 그나저나 그렇게 불편한데 왜 그만 두지 않았느냐고? 그냥 동갑내기 동기들이랑 노는 것이 즐거웠을 뿐. 동기들이 군대에 가버리자 나도 덩달아 동아리에 관심이 떨어졌지.


당시 생각해보면 참으로 바쁘게 살았던 것 같긴하다. 학교가 멀었던 지라 통학에는 최소 1시간30분에서 2시간이 걸렸고, 당시 우리집은 지하철역이 바로 앞에 있는 역세권도 아니었으니 엄청 이른 시간부터 부산을 떨었을 것이 분명하다. 뭔가 되게 자랑하는 것 같지만, 난 1학년 2학기 반장학금을 시작으로 꽤 많은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다(덕분에 그래서 이쪽분야와는 1도 관련없는 내가 무탈하게 대학원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상당히 많은 종류와 가지수의 아르바이트도 했다. 특히 어떤 종이회사에서는 나의 수업시간을 배려하며, 남는 시간에 와서 제발 일을 도우라고 할 정도로 의존도가 높아져서, 덕분에 아르바이트생을 뛰어넘는 직원 행세가 가능했다. 결국 친하게 지냈던 경리언니들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져서 그 회사를 떠날 정도였으니 꽤 잘 하긴 했었나보다. 밴드활동도 열심히 했다. 공연을 앞두고는 매일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집에 갔다. 노래도 하고 추가로 건반도 만졌다. 절대음감인지 상대음감인지, 할튼 뭐 그런걸 활용해서 음을 따는 능력-_-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연애도 했다.  사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은 애정을 퍼붓고 싶었던 내가 이렇게 변하게 된 것은 일단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나지 않아서였음이 분명하고 또 하나는 스무살 이후 계속 된 연애들 때문일 것이다. 나름 나의 그들에게 집중을 했던 시간이 있었고, 그리고 이후 잠시 한국을 떠나있던 시간도 있었고, 취업준비를 하기위해 무리에서 떨어져 공부방에 쳐박히던 시간도 있었다. 즉 내가 메인이 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던 때가 분명히 존재했었다.


그렇게 취업을 하고 회사에 들어왔는데 또 다시 나를 가로막는 난관. 바로 술이다. 회식자리에서 잔을 자연스럽게 돌리는 동기들을 보고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생전 듣도보도 못한 행동들을 자연스럽게 하는 그들. 노래방에서 일제히 춤..까지는 아니더라도 탬버린을 치며 스탠드업을 하는 것을 보고도 소름이 돋았다. 내가 다녔던 노래방은 앉아서 노래연습을 하는 곳이었다. 특히 밴드선배들 앞에서 노래라도 부를라치면 플랫된다고 지적받을까봐 열심히 불렀던 기억밖에 없다. 즉 음주가무와는 정말이지 거리가 멀었던 사회초년생. 추가적으로 신입사원들이 감당해야하는, 거절할수 없는 많은 양의 술들. 특히 신입시절은 제주에서 시작했던지라 독한 한라산과 즐겁고 진한 한때를 보냈다. 초등학교 동창회때의 그 망가지는 모습은 남들에게 절대 보여주기는 싫었기에=자존심이 상했기에 항상 화장실과 건물밖과 자리를 왔다갔다하며 꾸역꾸역 버텼다(지금도 회식은 좀 극혐하는 수준이다. 코로나가 참 우리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았는데 감사하는 것이 하나 있다. 덕분에 회식을 할 수 없다는 것!). 여튼 회식이 싫다보니 동기들이랑 모이는 것도 결국 술로 귀결되다보니 피하게 되었다.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냥 술자리 자체가 너무 불편했던것 같다. 그리고 취업준비생 시절에 생긴 나의 습관 하나. 겜방에 쳐박해서 헤드셋을 끼고 주변과 차단되어 게임을 하는 것. 또한 회사에서도 회사사람, 집에서도 회사사람, 놀때도 회사사람. 이게 너무 숨이 막혀올때가 많았다. 업무상 알게된 몇몇 타업체 사람들, 같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친구들을 만나 내 본체가 머무르는 main, 즉 근본적인 중심에서는 멀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때마침 육지에서 공수한 검은색 마티즈를 타고 아무도 없는 곳에 가는 것이 큰 낙이었다. 뭐 덕분에 아주 친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동기들과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설사 친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그 끈끈한 정이 이어지는 경우는 몇 없다. 아 물론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사람들은 아니다. 남들이 보면 충분히 친하다.


다시 돌아와서 정리하면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그 많았던 사람들은 술을 계기로 상당히 많이 떠나보내야만 했다는 이야기.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는 그런 자리가 있으면 억지로라도 갔어야 했는데 장애물 덕분에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 한명이라도 더 잃을까 싶어 끊어질 듯한 연락을 내 쪽에서 지속하고 연락이 끊긴 친구들은 수소문해서 찾고야 마는 그런아이였는데. 그리고 그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친구들 혹은 지인들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그런 아이었는데. 그렇게 과거에는 같은 반에서 상당한 시간들을 함께 부대끼며 정을 쌓았다면 막상 20대가 되니 술로 정을 쌓게 되더라는 슬픈 이야기. 그 공간과 그 시간에 참여하지 않으면 친해지기는 참으로 힘들다는 이야기.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지 않는 한 아무리 입사동기이고 아무리 같은 공간에서 경험을 공유했다 하더라도 그 강도와 지속기간에는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나이를 먹은 우리들은, 마음을 숨기고 싶어하는 우리들은, 약한 척을 하기 싫어하는 자존심 강한 우리들은, 맨정신에는 뭐든지 잘 털어놓지 않는다는 것. 함께 과음을 하며 젊은 패기로 실수도 하고, 싸움도 하고, 소리도 지르고  그렇게 서로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다 보여준-술로 맺어진 혈맹이 아닌 이상은 내막을 참 알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를 잘 즐기지도 않는 내가 회사에서 "좀 아는 사람"이 많은 것은, 예산부서에서 8년이나 있었어서 온갖 직렬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라 여겼었다. 그냥 형식적인 그런관계라고만 여겼었다. 동기들 포함 실제 본인들이 술을 먹거나 할때 나를 호출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나는 그들이 속한 세상에 함께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예산부에서 오래있었어도 "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다. 그리고 유사한 업무가 본사에만도 한두개가 아닐텐데 꼭 예산부서에 한정하는 것도 웃기지 않나? 

 일단은 마음을 돌려먹자. 예산부서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그냥 나이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생각해보자. 아까 점심때 2+1주스를 손에들고 편의점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에 만난 기계직 선배님 두분에게 어떻게 내 손에 들고 있던 주스를 내밀 수 있었을까? 같은 실은 커녕 부서에서 근무한 적도 없다. 같은 직렬도 아니다. 같은 동네도 아니다. 무엇보다 같이 술을 마신적도 없다. 그래서 우리들은 깊은 사이가 아니다. 난 그들의 비밀들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정도는 한다. 충분히 내 관계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아! 나는 얕고 넓은 인간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거구나. 발달과정에서의 나와 현재의 나에게서 연관성을 전혀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런것이 아니었다. 내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던, '얇고 넓은 인간관계'는 기가막히게도 어떻게든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상황이 그러했던 것이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다만, 술자리가 싫었..다기 보다 너무 어색했던 것 뿐이지. 그리고 기꺼이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우선순위에서 밀렸을 뿐이지. 그것보다 더 재미있고 집중할 수 있는 것들-이를테면 연애-을 찾았을 뿐인 것이지. 


그리고 고맙게도 어릴적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서 그랬던 모양인지 노력만 하면, 그랬던 나를 꺼내기만 하면 다시 메인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사실 예전만큼 100%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특히 회사에서는 발휘되는 것 같긴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가는 근원, 자신감이 있는 상태에서는 충분히 이게 가능한것 같다. 작년 이맘때쯤 동기회장을 맡으라는 수십명의 환호를 잠재워야만 했던 그때도 생각나고. 차도 없던 내가, 회계를 주특기로 입사했던 내가, 신입시절 맡았던 업무는 항공기운항과 관련된 모든 차량장비들을 운전하시는 제주 아저씨들을 교육하고 시험보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는 젊은여자가 육지에서 왔다고 엄청 무시당했지만 나중에는 농담따먹기 하면서 잘 놀다가 헤어질때는 무진장 아쉬하며 이별했던 기억도 있다.


그래 이제는 인정하자. 충분히 설명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얕고 넓은 인간관계 형성의 달인"이다. 날 믿어줬던 선생님들 덕분에 그러한 환경에서 자랐고 덕분에 무척이나 능수능란하다. 특히 까칠한 아저씨들한테 강하다. 학교다닐때 그 무섭다던 학생주임 선생님의 자가용도 얻어타고 다녔던 몸이다. 그래. 나 아는 사람 많다. 인사는 반갑게 하는데 상대방도 나와 친하다고 느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후배 하나가 내 결혼식때는 우리 공사 창립이래 가장 큰 규모의 축의금이 모일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해주었는데 저랑 오늘 인사하신 모든 분들, 우리가 축의금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걸까요? 사실 이렇게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진짜 깊은 사이는 아니라는 반증. 과거에 내가 맺었던 그 관계보다는 분명 더 얕아졌을지는 몰라도 또한 그 범위가 조금은 더 좁아졌을지는 몰라도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다는 데에서 소름이 돋는다. 진짜 몰랐다. 그냥 과거의 나는 뭔가 더 화려하고 사람들한테 둘러쌓인 행복감에 도취되어 자신감이 어마어마한 가증스러운 꼬마였다고만 생각했었으니까.




[Part2][내가 가지고 있는 다문화 역량은 무엇인가? 강점은? 더 성장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글을 쓰면서 새삼 나의 능력에 대해 깨닫는 시간이 되버렸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는 바로 그 것. 친화력은 정말 높은 것 같다. 그냥 처음 만나는 사람이랑도 어렵지 않게 대화한다. 침묵이 흐르는 어색한 순간을 극혐하는지라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쉴새없이 떠들 수 있는 능력도 구비되어 있다. 대화를 이어가는 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좀 기억을 잘하기 때문이다. 최근 기억이야 뭐 깜빡깜빡한다지만 비교적 오래전의 기억들은 장기기억에 콕 박혀서 고착화가 된 듯 수시로 꺼내쓰는 것이 가능하다. 사람들은 본인의 얘기를 기억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본인도 잊고 있었던 기억을 꺼내주는 것은 더 좋아한다. 그리고 관련있는 것을 기막히게 뽑아낸다. 단 1의 관련이 있다치더라도 끄집어내어 어떻게든 연결시켜보려 노력한다. 짐작했듯이 어릴적부터 갈고닦아놓았던 스킬이다. 친구를 잃는것, 기억을 잃는것이 싫어서 일지와 일기를 수도없이 적어왔고, 그것들은 반복해서 잃다보니 나름 기억에는 좀 자신이 있다. 또한 앞서 나의 소망 중 하나였던, '내가 아는 모든이들이 다 서로 알고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어!'를 이야기할때 나왔던 바로 그 얘기. 서로 모르는 이들을 연결시켜주기 위해 서로 연결고리를 찾아보게 하기위한 먹잇감을 던져줄때 자주 써먹었던 방법이다. "A 동기야, 얘도 우리학교 나왔어!" 라는 식으로 학연 또는 거주지로 엮는 것은 아주 쉬운 최하급의 스킬이다.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 학교 얘기는 해서 뭐한담? 이걸 좀 다르게 구사하면 이렇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조합해서 질문을 만든다. "A 동기야, 너 신입사원 연수받을때 너가 자청해서 학생장 하지 않았어? ㅇㅇ팀장님이 그러는데 B 후배도 학생장 출신인데 얘도 자진해서 손들었대!" 이런식. 나는 A에 대한 기억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B와 대화할 수 있는 물꼬를 터주었다. 나는 이제 지켜보면 된다. 그들은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 무슨 3류 처세서 쓰는 것도 아니고, 다시 돌아와 보자.  이 나의 '친화력'이라는 개념은 잘 뜯어서 들여다보면  꾸며진 친화력과는 좀 다르다. 그런 연기 절대 못한다. 그래서 솔직히 고백하건데 남자들과의 대화보다 여자들과의 대화가 더 어렵고 그런 그들과 친해지기도 더 힘들다. 모여있는 그네들끼리 화장품이 어떻고 머리스타일이 어떻고 오늘 입은 옷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듣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다. 나는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말 아무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에게 어떤 후배는 본인도 원래는 나와 같은편인데 어쩔 수 없이 그냥 지어서 하는 거라고 했다. 소름이 돋았다. 왜냐면 진심인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게 단점이자 장점이 될 수도 있는데, 이런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 혹은 솔직한 사람들과는 급격하게 친해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본다고 해야하나?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잘 안다. 내가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것. 그래서 그 진실성 때문인지 비록 술자리에서 맺은 혈명의 관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친한척들을 해주시는 것 같다.


다문화상담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여태까지 내가 만난 사람들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한테는 한없이 작아지는 나이지만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이 본인을 많이 숨길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설사 거짓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상담의 효과를 높히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솔직해짐을 부탁할 것이다. 그렇게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로 만들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일단 대화의 물꼬가 트이면 잘 이끌어 나갈 자신이 충분히 있다고 본다. 추가로 나는 나름 해외경험을 통해 다문화를 경험해본 사람이다. 주류의 유럽문화 보다는 호텔값이 비싸지 않은, 휴양지에 길들여진 누군가에게는 오지로 비춰지는 그런 곳을 선호하여 여행해왔던 사람이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그리 길지는 않을 테지만, 아주 짧은 시간일 테지만 그래도 그들을 이해할수 있는 요소를 하나정도는, 조금 욕심부리면 두 개 정도는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혹자는 얕고 넓은 인간관계 맺기를 주로 하는 사람이면 너무 인간관계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며 상담에는 맞지 않다고 비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 나 자신 역시 그런 줄 알고, 그럼 여태까지 적어내려간 것은 다 휴지통으로 가야하는 것인가 하며 등에 잠시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최적의 상태라는 생각. 어떤 한 내담자를 편애하며 특히 깊은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닌, 모든 내담자에게 공평하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상담을 진행할 수 있는 최적의 상담사가 될수 있다.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며 상담을 진행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공감능력이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난 경험을 바탕으로, 아직 개뿔 정식으로 공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초보이지만 일단은 자신감이 무진장 넘쳐나고 있다. 사실 좀 많이 돌아왔지만 충분히 내가 필요로 했던 것을, 나와 잘 맞는 무언가를 찾았다고 믿고 있는 지금, 이런 상태가 앞으로도 계속 되길 바란다. 나의 짧은 삶을 되돌아봤을때 이미 깨닫지 않았는지, 뭐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지만 자신감에 가득차 눈이 반짝반짝 거릴때 인간관계에 대한 메인 능력이 발휘되곤 했었다는 것.  정답은 없다. 인간관계를 맺는데에 있어 어떤 것이 상담자에 더 적합것인지에 대한 정답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에 대한 정답은 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기본적으로 얕고 넓은 인간관계를 즐기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자신감에 차있을때 심리적으로 무척 편한 상태일때 더욱 활성화 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잘 지켜갈 것이다. 우울해지지 않을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를 도울 수 있도록, 나 자신도 최선을 다해 생활할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참 다행이다. 난 술을 마시면서 상담을 진행할 생각은 없으니. 환경을 통제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무리 친구같은 상담사를 꿈꾼다 하더라도 술은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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