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삽질은 여전히
출발
일어나서 또 아침밥 해먹고 집을 나섰다. 근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불을 조금 늦게 끄는 바람에 나의 1인분 밥하기 전용 스프냄비 바닥이 쪼매 타서.. 물에 푹 담가서 싯는다고 싯었는데 혼날까봐 걱정된다.
일단 두려운 마음은 접어두고 어제 봐두었던 정류장을 향해 씐나게 걷는다. 분명 지도가 있으니 확실히 의지하게 되는것 같다. 몇번이나 반복해서 걸었음에도 불구하고 GPS를 켜지 않으면 또 길치모드로 변하는, 허세부리며 지도없이 걷다가 자꾸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을 지나치는 내가 이제는 새삼 놀랍지도 않다.
또 만났네 또 만났어
정류장에 도착하니 어제의 그 터키 부부가 또 보인다. 이제는 좀 반갑다. 부근에 주차하고 있던 버스에 다가가 앉아있던 기사에게 시간을 묻는것 같다. 그리고 나서 나를 보고는 나처럼 반가워 하시더니 버스부스 근처로 데리고 가서 친절하게 시간표를 손으로 짚으시면서 말씀해주신다.
"지금은 휴일이야. 오늘은 26일인데 왜 휴일인건지.. 근데 기사가 오늘도 휴일이래. 참 이상하지? 어쨌든 로도스에서 린도스는 아침 9시, 11시30분, 13시에 출발하고, 돌아오는 버스는 7시30분, 10시30분, 13시, 14시30분에 있네"
내가 도착한 시간이 대략 11시쯤. 우리는 11시 30분꺼를 타고 갔다가 14시 30분 버스를 타고 돌아오자고 하신다. 시간표는 사진 참고.
또 다른 부부를 만났습니다.
버스타기 직전에 한 중년의 부부인지 커플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분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셨다. 백발의 백인아저씨와 흑발의 황인아줌마이다. 터키부부는 나에게 했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로도스와 린도스의 버스 시간표에 대한 브리핑을 해주신다. 브리핑은 성공적이었다. 백발의 백인남자분이 "원더풀!!"을 외치신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감탄사를 쓰는 건 그들만의 특권인것 같다. 한국사람들의 경우 보통 그냥 "Ah~"이런 감탄사로 끝날 듯한데. 나도 마찬가지고요.
그리고는 버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터키아재와 대화를 좀 하고 있었다. 근데 터키 아재가 내게 서울이랑 부산 등등 한국에 와봤다는 말씀을 하시는걸 들었는지, 백발의 외쿡 남자분이 갑자기 나에게 한국말로 "알↗녕↗허↗세욧!!'를 하시더니 사라지셨다. 넘나 깜짝놀라던 와중에 버스문이 열려서 일단 버스에 탑승하기로 한다.
잠시 후 황인여자분이 먼저 타서 자리를 잡으시고 잠시 후에 백발의 백인이 무언가를 들고 타셨다. 맛있는 냄새가 쩐다. 알고 보니 버스 부스 앞에서 파는 무언가를 포장해서 들고 타신듯. 향기.....아니 냄새난다고 버스 안에서 먹지 말라고 기사아저씨가 혼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에 대화를 했는데 알고 보니 백발의 백인아저씨는 호주아저씨였다. 희안하게 뭔가 따뜻하고 사람을 참 편하게 해주시던 관계로 대화가 쉬웠다. 그리고 같이 계시던 흑발의 황인아줌마는 알고보니 한국말이 유창한 한국아줌마였기에 너무 신기해서 괴성을 질렀다. 이럴때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군요.
린도스 도착
도착하니 대략 출발 1시간정도가 지난 12시30분쯤 되었다. 아무리 시간을 계산해봐도 넉넉한 시간은 아니었다. 조사결과 평지가 아닌 거의 등산을 한 이후에 아크로폴리스를 비롯한 이곳의 랜드마크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2시반 막차 버스를 타고 복귀하려면 넉넉잡아서 많아봤자 2시간이 전부라 서둘러야만 했다.
린도스 시티 관통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그래도 그 호주+한국부부랑은 대화를 좀 했다. 호주아재에게 "헬로우 마이트"와 "노워리스"를 해드리니 호주영어 완전 반갑다고 싱기방기해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연인이 아닌 부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꽤 오랜기간 부부로 지내오셨던 것 같다. 서로에게 허니허니 하는데 넘나 익숙하다. 댄따 신기하다. 그 나이대에 국제결혼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근데 터키부부는 어디로 가버리셨던 걸까?
그러다가 나는 마음이 급한데 그분들은 천천히 가시는걸 원하는 듯하여 나중에 보자하고 나는 다시 미친듯이 튀어나갔다. 일단 아크로폴리스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린도스 마을을 가로질러야 한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을줄 알았는데 골목이 은근 좁고 구불구불해서 결국 구글지도를 켜야만 했다. 시간이 많다면야 멍때리며, 헤매는 것을 즐기며 천천히 가도 상관이 없는데 지금의 나는 바로 목표지점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뭔가 상점들이고 뭐고 문들이 굳게 닫혀 있어서 도시는 참 조용했다. 간간히 나도 여기 살고있어요 하는 분들 사이를 지나쳐 미친듯이 걸어간다. 막상 아크로폴리스에 도착하면 뭐가 어찌될지 모르니, 더 보고싶싶은데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으니 일단 빨리 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크로폴리스를 향하여 돌진
목적지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근데....
힘들게 도착했는데...
것도 1빠로 도착했는데....
문이 잠겨있다.
처음에는 이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분명 크리스마스가 지난 12월 26일인데 휴일이라니... 토요일이나 일요일 같은 빨간날도 아닌데. 문을 흔들어봐도 안에서는 인기척이 없다. 자물쇠까지 걸린거 보니 진짜 오늘 쉬는날인가보다. 어이가 없다. 순간 여기까지 올라오는 길에 목격했던... 굳게 닫혀있던 상점들이 생각이 났다. 아.. 그래서.. 님들도 쉬셨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물쇠로 굳게, 이중으로 얄밉게 쿠왕 닫힌 문을 지나쳐서 성벽을 끼고 돌아보았으나.. 다른 입구가 있나 해서 가 봤더니 그냥 막다른 길이다. 이건 꿈이야...... 나 정말 힘들게 올라왔단 말이다. 종아리 땡긴단 말이다.
그래도 주변은 둘려보는걸로. 왜냐면 이쁘니까.
어떻게든 하트모양을 찍고 싶어서 길이 아닌 곳을 오르고 별 생쇼를 다해보았으나 결국 이게 다였다. 하트라고 생각하고 바라보면 그것이 곧 하트일 것이니.. 하트일지어다. 사실 아크로폴리스 내부가 가장 높은 곳이라.. 거기서 찍어야 제대로 하트가 나오는데 나는 내부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하.. 여러가지로 아쉽다.
아크로폴리스 내부에는 아테나 린디아 신전, 기타등등 유적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어 나는 그저 성벽보다 높아 고개만 빼꼼 나온 기둥들만 바라만 볼 뿐 답이 없다.
아쉬운 마음에 부근에서 계속 뱅뱅돌면서 배회하고 있으니 몇 팀인가 올라와서는 닫힌 문을 보고 나처럼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뒤늦게 도착한 호주한국인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대로 산을 타고 내려가 해변 근처로 가본다고 했다. 가서 커피한잔 마시고 복귀하면 딱이라고 같이 가자고 하셨는데 구태여 따라가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분들이 가신쪽은 사도바울이 상륙한 지점이라고 하더만요.. 여튼 나는 제대로 된 하트하트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부근에서 계속 왔다갔다 하다가.. 아크로폴리스 성벽을 한번 기어서 넘어볼까도 진지하게 고민해보다가 결국에는 한정없이 거기 있을수만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결국 내려가기로 한다. 내려가는 길에는 미친듯이 기어올라온다고 패스했던 풍경들을 눈안에 담기로 한다.
빠르게 갈 때는 못봤던 것들
하산하셨습니다
마을을 벗어나서 버스내려 준 곳으로 돌아와보니 이런 동상이 있다. 음각으로 새겨진 이름을 읽어보니 'Kleoboulos'라고 써있다.
후다닥 사랑스런 그리스 심카드를 활용해 검색해보니 이 분이 여기 다스릴 때 린도스가 제일 잘 살았으며 이때 아테네 신전도 지어서 덕분에 이 일대가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나름 플라톤의 저서에서 언급 되었던 고대 헬라스 지역의 7현자중 하나셨다고.. 동상 뒤로 저 멀리 보인다. 내가 한 발자국도 못 들어가본. 코 앞에서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던. 바로 그 아크로폴리스.
사실 하트하트 만을 찍기위해 사실 일찍 하산 했던 것도 있다. 마을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형태였고 아까 버스에서 내린 뒤 마을로 진입했던 메인도로도 상당히 경사가 있었기 때문에. 아까 버스타고 왔던 곳 쪽으로 가면 하트모양이 더 잘 보일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근데 택도 없는 소리.
동상과 마을쪽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좀 가보기로 했다. 사유지같은 느낌도 들었는데 어설프게 나무로 울타리를 쳐 놓기도 했던 관계로. 근데 뭐 어차피 사람도 없고해서 훅 들어가본다. 염소인지 양인지.. 풀 뜯어먹고 놀고 있다가 나를 보고 저건뭐야 하고 한참을 째리더니 자리를 피해준다. 드러워서 피하...? 그렇게 시간도 좀 남았고 하니 인근을 좀 더 누비고 다닌다. 그냥 그런 농촌이다. 교회도 하나 있는 것 같았는데 유적지처럼은 안 보이는 새삥한 건물이었음. 로도스행 버스 출발 시간이 다가올때 쯤 정류장 부근으로 돌아갔다.
린도스->로도스로 복귀
버스타는 시간이 다가오자 같은버스에 탔던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삼삼오오 다시 모여온다. 우리가 타고 왔던 버스 대신 일찌감치 아침 9시 버스를 타고 왔던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막차라 이걸 못타면 로도스 시티로 못 돌아가니깐 전부 있을수밖에.
갈 때처럼 약 1시간여를 달려서 버스는 아까 탔던 곳으로 돌아왔고 어찌어찌하다보니 그 호주한국인 부부 (이름도 알려주셨는데 아.. 나의 기억력이란;;)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최근 여행하면서 그렇게 편하게 영어로 대화를 한건 처음이었다. 그리스, 아니 해외생활에 이미 많이 적응하기도 했고. 진짜 그냥 뭔가 편안한 느낌. 호의가 느껴져서 그랬던 걸까?
인생 기로스과의 만남
기로스는 그리스식 케밥이라고 해야하나, 사실 모양은 똑같은데 이름만 다른것 같다. 근데 지금 찾아보니 케밥은 그냥 꼬치구이를 다 얘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야된동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수 있는, 고기 뭉탱이를 꼬챙이에 꽂아서 뱅뱅 돌리다가 일부를 칼로 슥슥 잘라서 야채 넣고 얇은 빵에 돌돌 말아서 먹는 그것. 아류작으로는 KFC트위스터와 맥도날드 스낵랩이 있다...라고 오스나씨가 말했다.
우야된동 사람들이 줄지어서 사고 있길래 나도 한번 줄을 서보았다. 뭔가 규칙이 없는 듯 있는 듯 한 두 개의 줄이었는데 알고보니 내가 서있던 줄은 기로스를 사는줄이 아니라 음료수 사는 줄이었다. 뚜쉬. 뭐 근데 줄을 다시 선건 아니고 당당하게 옆으로 새치기하여 이동하여 분위기를 보는데... 왜키 내 주문은 안 받아주니? 그도 그럴것이.. 정말 시장바닥에서 흥정하는 것 같은 시끄러운 분위기라 용기를 내어 크게 말하지 않으면 주문이 묻히는 상황. 우야된동 주문은 성공했다. 안에 내용물은 치킨으로 결정. 주변을 살펴보니 이미 득템을 마친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그냥 서서 먹거나 몇 개없는 식탁에 앉아서 먹고 있는 중이다. 마침 주문받는 소녀가 "take away?" 라고 물어봐줘서 나도 모르게 올타쿠나 그러라고 했다. 바닷가가서 먹어야겠다.
도심을 벗어나서 숙소부근, 바닷가 부근으로 걸어간다. 이제는 도로가 약간 익숙해진것 같기도 하고. 몇번이고 지나쳤던 상점들도 이제서야 눈에 익다. 그래도 여전히 구글지도의 힘을 빌려야 하는 이 길치 신세라니.
로도스 시내에는 나름 유명한 브랜드의 매장들도 있고 한데 크리스마스, 그리고 비수기라서 오픈한 곳은 별로 없다. 후에 확인해보니 이 동네는 크리스마스 휴일이 25일까지가 아니고 26일까지였나 보더라. 조금 규모가 있는 큰 슈퍼마켓은 떠나는 날인 27일에도 열려있는 것을 보지 못했고, 그저 작은 키오스크 형태의 가판들만이 간간히 장사를 하고 있었다.
인생 낙조와의 만남
다시 바닷가로 왔다. 여기까지 봉다리 달랑달랑 들고오면서 이거 식어버리면 어떡하나 얼마나 걱정을 했던지. 아침에 출발할때와는 봤던 것과는 또 다른 풍경이다.
집에 왔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내일 아테네행 비행기는 오후 7시에 뜨는 관계로 충분한 시간이 아직 남아있다. 그나저나 그랜드마스터성 내부랑 박물관은 내일은 진짜 오픈하겠지? 분위기가 거기도 린도스 아크로폴리스 마냥 오늘도 닫혀 있었을 것 같지? 대체 이 동네 크리스마스 연휴는 언제까지 인걸까? 검색해도 카페에 질문을 올려봐도 답은 안나오고 그렇게 미궁에 빠진 상태로 아직 겨우 하루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새삼 통탄을 금치못하며 아쉬움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아까 낙조를 배경으로 지중해에 건배하며 원샷했던 케밥은 한끼 식사로 무진장 훌륭했다. 가격은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 분명 쌌을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거하게 먹었던 지난날이 무척이나 후회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딱히 집으로 돌아와서 저녁을 챙겨먹을 생각은 하지 않았었고. 가판에서 사왔던 사과맛 맥주를 음료수 마시듯 꿀꺽하고 잠이 들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토-_-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로도스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는 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