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가 있다는 것에 대한 단상

머리끈 전용보관서랍을 만들어 주고 기쁜마음에 불현듯

by 오스나씨

본인은 꽤 긴 머리의 보유자다.

회사에서는 머리를 잘 묶지 않는다.

이럴때만 빼고.

1. 외부손님 방문 or 윗님들께 보고를 가야할때. 머리 산발 노노.

2. 머리 안감았을때.


보통 집에 오면 바로 싯는 편인데,

욕실로 들어가기전 항상 머리를 틀어올린다.

그런 채로 생활하다 자기 전에는 머리를 푼다.

일반적으로 침대 이불 속에서 머리를 풀게 되는 지라

대부분의 머리끈은 침대 옆 협탁에 쌓여있다.

그리고 가끔은 화장대 근처에서,

욕실 세면대 위에서,

샤워부스 안에서도 종종 발견되곤 한다.


문제는 다시 머리를 묶을 때다.

항상 욕실로 들어가기 직전 머리를 틀어올리는 곳은

욕실 문 바로 건너에 있는 화장대.

근데 막상 머리를 묶으려니 머리끈이 안 보인다.




우선 화장대 근처에서 찾느라 하세월.

서랍도 열어보고 거울장도 열어보고

거울 앞 바구니 안도 뒤적거려보고

어제 입었던 옷 주머니도 뒤져보다가

결국 머리끈의 무덤인 협탁 근처로 간다.


222.png 지금은 파묘된 머리끈 무덤


침대와 벽 사이 좁은 공간을 통과한다.

그러다 또 모서리에 무릎을 찍고 눈물을 흘린다.


이렇게 수년을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드디어 내 생활에 혁신이 찾아온다.


본인은 나름 정리강박이 좀 있는 편이라

집에는 뭔가 정리를 위한 소품들이 많다.

화장대 정리를 위해 사두었던 수납함도 마찬가지다.

화장품 샘플들을 비롯한 잡시구리한 것들 보관을 위해,

튜브형 화장품, 낮은 화장품, 높은 화장품 구분을 위해,

그리고 작성하기 귀찮은 암튼 그 많은 것들을 위해

고민하고 고민하다 손수 주문버튼을 누른 것이었지만

항상 시작은 창대하고 마무리가 미약한 나인지라

거울장 안에 일단 대충 자리잡고 있었던 바로 그것.


뭐 어렵지 않았어.

그날 아침에는 머리를 좀 묶고 가려는데

보이는 곳에 머리끈이 없어서

협탁에서 머리끈 뭉텡이를 들고 온 김에

불현듯 그 서랍이 생각이 난 거야.

일단 대충 한 칸을 비워서 공간을 만들었어.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것들을 때려넣었지.


11.png 나름 고민해서 선정. 왼손으로 머리잡고 오른속으로 서랍열기 딱 좋은 위치


근데

이거 참 별거 아닌데,

이 사소한 것 하나 덕분에 마음이 참 편해졌다는 이야기.

이제는 머리끈이 보이는 족족 집어서

저기에 넣으면 되는거더라고.



제자리가 있다는 것.



이걸 어디에 둘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그게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의 초고효율을 지향하는 나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이야기.


머리를 묶을 때는 머리끈이 모여있는

이 작은 서랍만 열어서 꺼내면 된다.



333.png \^_^/



그리고 누군가와 맺은 관계에서도

모두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는 회사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

회사를 대입해 생각해보면,


우리 회사 우리 부서에 이런 직급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내가 근무하도록 지정된 사무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무실에는 내 자리가 있다.

내 책상과 의자, 그리고 내 이름이 등록된 PC가 있다.

나는 출근하면 대부분 그 곳에 있으며,

회사의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으면

이 자리로 오면 된다.


새로운 누군가가 발령을 받게되면

가장 처음 하는 일도 이런 맥락의 것들이다.

동시 전보가 나서 이동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리에 앉게하거나

만약 자리가 없다면 만든다.

그에게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관념적으로 생각해보면,

회사 내에서 최적의 자리는

내가 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리,

기꺼이 나의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자리,

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

그게 바로 제자리인 것이지.


또한 그룹 내에 나를 믿어주는 누군가,

오직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온갖 굳은 역경이 몰아쳐도 다 헤쳐나갈 수 있다고 하잖아.

누군가의 존재 자체가

바로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

즉 제자리라는 증거.


근데 만약 나의 그 자리가 없다면?

혹은 여기는 나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지옥같겠지.....

머리끈이 어디있는지 몰라서 불안해하던,

당장 머리를 묶기 위해 모양을 잡아

힘들게 움켜쥔 머리카락을 놓칠까봐

불안해하던 나처럼.


그리고 제자리는

아무리 어떤 방황을 하고 어떤 곳을 돌아다니던간에

종국에는 돌아와야 할 그 곳.

그래서 있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곳.

머리끈이 사방팔방 온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어도

결국 그 서랍으로 모이게 될 것을 알기에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알기에

잠시간의 방황은 흐린 눈을 하고 눈감아 줄 수 있는 것.

그렇게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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