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서라는 이름의 회고 - 2장 : 결혼

결혼, 그리고 가족이라는 우주

by Fixframe

만남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1998년이었다. IMF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흔들리던 그 암울한 시기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내 인생의 빛을 만났다.


당시 나는 스물여섯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의 작은 회사에 취직한 지 이 년째 되던 해였다. 회사는 작았지만 나름 안정적이었고, 월급은 적었지만 꾸준했다. 부모님은 슬슬 결혼 이야기를 꺼내셨고, 나는 그때마다 “나중에요”라고 대답했다.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 됐다고, 돈도 더 모아야 한다고, 승진도 해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두려웠다.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 산다는 것이,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그 모든 것들이 막연하게 무서웠다.


그해 가을, 대학 동기의 결혼식에 갔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결혼식장은 언제나 어색했다. 오래된 친구들을 만나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축의금 봉투를 내밀고, 뷔페에서 혼자 밥을 먹고 돌아오는 그 과정이 불편했다.


식이 끝나고 뷔페로 이동했다. 접시에 음식을 담으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저기, 새우 좀 집어주실래요?“라고 말했다. 돌아보니 한 여자가 서 있었다. 키는 작았다. 160도 안 됐을 것이다. 단발머리에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웃고 있었다.


“손이 안 닿아서요.” 그녀가 다시 말했다. “새우가 너무 안쪽에 있네요.”


나는 멍하니 새우를 집어 그녀의 접시에 올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돌아서서 가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혹시 신랑 쪽 하객이세요?”


“네. 대학 동기입니다.”


“아, 저는 신부 쪽이에요. 신부랑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렇군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나는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날씨가 좋네요, 오늘.”


“네, 결혼식 날씨로는 완벽하죠.”


다시 침묵. 그녀가 먼저 말을 이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저도요. 같이 앉을래요? 혼자 먹기 좀 그렇잖아요.”


그렇게 우리는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수진이었다. 나보다 두 살 어렸다. 초등학교 교사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좋다고 했다. 힘들지만 보람 있다고,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하는 내내 웃었다.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형이 웃을 때처럼. 그 웃음이 좋았다. 따뜻했다.


“뭐 하세요?” 그녀가 물었다.


“회사 다녀요. 작은 제조업체에요.”


“무슨 일 하는데요?”


“경리 쪽이요. 숫자 다루는 일이요.”


“아, 수학 잘하시나 봐요.”


“그냥 그렇죠. 뭐.”


그녀가 웃었다.


밥을 다 먹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른 하객들은 이미 다 떠났다. 우리만 남아 있었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녀가 말했다.


“네.”


우리는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다. 가을 햇살이 따뜻했다. 그녀는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주차장 쪽으로 가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그녀가 돌아봤다.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가 웃었다. “전화번호 드릴까요?”


그렇게 시작됐다.


연애


처음 데이트는 일주일 후였다. 토요일 오후, 시내의 커피숍에서 만났다. 나는 삼십 분 일찍 도착해서 기다렸다. 긴장됐다. 손에 땀이 났다. 대학 시절 이후로 여자와 제대로 된 데이트를 해본 적이 없었다.


수진이 도착했다. 청바지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간단한 차림이었지만 예뻤다. “기다렸어요?” 그녀가 물었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거짓말이었다.


우리는 커피를 주문하고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가을 거리는 아름다웠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에 흩날렸다.


“평일엔 바빠요?” 그녀가 물었다.


“그냥 그래요. 회사 일이 다 그렇죠. 그쪽은요?”


“애들이 손이 많이 가요. 특히 요즘은 학예회 준비 때문에 정신없어요.”


“학예회요?”


“네, 애들이 연극하고 노래하고 그래요. 귀여워요, 진짜.”


그녀는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 눈이 반짝였다. 한 아이는 연극에서 토끼 역할을 맡았는데 대사를 자꾸 잊어버린다고, 다른 아이는 노래를 부르는데 박자를 못 맞춘다고, 하지만 그런 모습들이 다 사랑스럽다고.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따뜻한 사람이구나.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좋은 엄마가 될 거구나.


그날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났다. 주말마다. 때로는 주중에도. 영화를 보러 갔고, 공원을 산책했고, 맛집을 찾아다녔다. 그녀는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나는 매운 걸 잘 못 먹었지만 그녀를 위해 먹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떡볶이를 먹는 나를 보고 그녀는 웃었다. “억지로 먹지 마요. 나 혼자 먹을게요.” 하지만 나는 계속 먹었다. 그녀와 함께라면 매운 것도 괜찮았다.


세 달이 지났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줄 선물을 고민했다. 뭘 좋아할까. 무엇이 그녀를 기쁘게 할까.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봤다. 목걸이, 귀걸이, 시계.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무 흔했다. 특별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서점으로 갔다. 수진은 책을 좋아했다. 데이트할 때마다 서점에 들르곤 했다. 나는 동화책 코너로 갔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읽어준다고 했던 책들을 찾았다. 그리고 가장 예쁜 그림의 동화책 열 권을 샀다. 선물 포장을 부탁했다.


크리스마스이브, 우리는 시내의 불빛 축제에 갔다. 거리는 화려한 조명으로 빛났다. 사람들로 붐볐다. 연인들이 손을 잡고 걸었다. 나도 수진의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그녀의 손은 작고 따뜻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수진은 기뻐하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첫눈이다!” 그녀가 외쳤다. 눈송이가 그녀의 머리에, 어깨에, 손등에 내려앉았다.


벤치에 앉아 선물을 교환했다. 그녀가 먼저 내게 선물을 건넸다. 열어보니 머플러였다. 회색 머플러. “제가 직접 뜬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처음 떠본 거라 좀 삐뚤빼뚤할 거예요.”


나는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따뜻했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내가 말했다.


“이제 제 차례네요.” 그녀가 말했다.


나는 선물을 건넸다. 그녀가 포장을 뜯었다. 동화책들이 나왔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예요?”


“아이들한테 읽어줘요. 그랬잖아요, 아이들이 책 읽어주는 거 좋아한다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마워요. 정말… 정말 고마워요.”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녀가 말했다. “저, 질문 하나 해도 돼요?”


“물론이죠.”


“우리… 사귀는 거 맞죠?”


나는 웃었다. “당연하죠.”


“그럼 언제부터 사귄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요. 결혼식장에서 새우 집어줬을 때부터.”


그녀가 웃었다. “그때부터였어요?”


“네. 전 그때 이미 알았어요. 이 사람이다, 라고.”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이미 뭔가 느꼈던 것 같다. 그녀의 웃음에서, 목소리에서, 따뜻함에서.


청혼


일 년이 지났다. 1999년 가을, 나는 청혼을 결심했다. 반지를 샀다. 월급의 삼 개월치였다. 비쌌지만 아깝지 않았다. 그녀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장소를 고민했다. 어디서 청혼하면 좋을까. 레스토랑? 너무 흔하다. 공원? 너무 평범하다. 결국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 결혼식장. 정확히는 그 앞 공원.


토요일 저녁, 수진을 그곳으로 데려갔다. “왜 여기 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냥요. 좋은 곳이잖아요.”


공원 벤치에 앉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아름다웠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긴장됐다. 손이 떨렸다.


“수진 씨.” 내가 말했다.


“네?”


“우리 만난 지 일 년 됐어요.”


“그러네요. 벌써 일 년이나.”


“전… 수진 씨를 정말 사랑해요.”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눈이 반짝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수진 씨 생각이 나요. 출근하면서도, 일하면서도, 퇴근하면서도. 항상 수진 씨 생각이에요.”


“저도요.”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수진 씨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어요. 수진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평생.”


나는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이 더 커졌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어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울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기다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네.” 그녀가 마침내 말했다. “네, 좋아요.”


나는 그녀의 손에 반지를 끼웠다. 딱 맞았다. 그녀는 반지를 보며 계속 울었다. 나도 울었다. 우리는 서로를 안았다. 공원 벤치에서, 지는 해를 배경으로.


결혼 준비


결혼 준비는 생각보다 복잡했다. 양가 상견례, 예식장 예약, 청첩장 제작, 혼수 준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상견례는 긴장됐다. 수진의 부모님을 처음 뵙는 날이었다. 고급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나는 새 양복을 입었다. 부모님과 함께 도착했을 때 수진의 가족은 이미 와 있었다.


수진의 아버지는 무서워 보였다. 키가 크고 목소리가 낮았다. 어머니는 온화해 보였다. 수진을 닮았다. 수진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다. 대학생이었다.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수진의 아버지가 물었다. “직장은 안정적입니까?”


“네, 작지만 탄탄한 회사입니다.”


“집은 마련했나?”


“아직은 전세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모아서 곧 집을 살 계획입니다.”


“우리 딸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수진을 바라봤다. 그녀도 나를 바라봤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진의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식장은 수진이 골랐다. 시내의 작은 웨딩홀이었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아늑했다. “여기가 좋아요.” 수진이 말했다. “너무 크지 않고, 따뜻해요.”


청첩장을 만들 때 우리는 문구를 고민했다. 뭐라고 써야 할까. 결국 간단하게 쓰기로 했다. “서로를 사랑합니다. 저희의 시작을 축복해주세요.”


2000년 봄, 우리는 결혼했다. 밀레니엄의 첫해, 새로운 천년의 시작에.


결혼식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났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부터 나는 남편이 된다. 가장이 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하객들이 모여 있었다. 친구들, 친척들, 회사 동료들. 모두들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대기실에서 형을 만났다. 형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멋있었다. “떨리냐?” 형이 물었다. “네.” “괜찮아. 나도 그랬어. 근데 막상 하고 나면 별거 아니야.” 형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행복하게 살아.”


식이 시작됐다. 나는 단 위에 섰다. 문이 열리고 수진이 들어왔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수진은 천사 같았다. 아름다웠다. 내 평생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수진이 내 옆에 섰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주례가 말했다. “신랑 신부는 이제 부부가 됩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합니까?”


“네.” 우리는 동시에 대답했다.


반지를 교환했다. 수진의 손이 떨렸다. 내 손도 떨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반지를 끼워줬다.


“이제 신랑은 신부에게 입맞춤하십시오.”


나는 수진을 바라봤다. 그녀도 나를 바라봤다. 우리는 천천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키스했다. 짧지만 달콤한 키스. 하객들이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제 정말 시작이구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신혼


신혼집은 작은 투룸 아파트였다. 전세였다. 우리가 가진 돈을 모두 보증금으로 넣었다.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우리에게는 서로가 있었으니까.


첫날 밤, 짐을 다 풀고 나서 우리는 텅 빈 거실에 앉았다. 가구가 별로 없었다. 작은 소파 하나, 작은 식탁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 그게 전부였다.


“허전하네요.” 수진이 말했다.


“천천히 채워가요.”


“그래요. 우리 함께 채워가요.”


우리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웃었다.


신혼 생활은 행복했다. 매일 아침 함께 일어나 아침을 먹고, 함께 출근하고, 저녁에 함께 집에 돌아왔다. 수진은 요리를 잘했다. 나는 설거지를 맡았다. 역할 분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주말에는 함께 장을 보러 갔다. 마트를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샀다. 수진은 장 보는 것을 즐거워했다. “이거 살까요? 저거 살까요?” 아이처럼 신나 했다. 나는 그런 수진을 보며 웃었다.


가끔 다퉜다. 사소한 일로. 설거지를 안 했다고, 불을 끄지 않았다고, 양말을 아무데나 벗어놨다고. 처음에는 그런 다툼들이 무서웠다. 우리 관계가 깨질까 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됐다. 싸우는 것도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을. 중요한 건 싸운 후에 화해하는 것,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


첫 아이


결혼 이 년 차, 수진이 임신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다. 수진이 퇴근하고 집에 왔을 때 이상하게 들떠 있었다. “어보, 앉아봐요.” 수진이 말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좋은 일이에요.”


수진은 주머니에서 임신 테스트기를 꺼냈다. 두 줄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봤다.


“우리… 아기 생겼어요.” 수진이 말했다.


나는 말을 잃었다. 아기. 우리의 아기. 내가 아버지가 된다고?


“기쁘지 않아요?” 수진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니에요. 기뻐요. 정말… 정말 기뻐요.”


나는 수진을 안았다. 꽉 안았다. 수진도 나를 안았다. 우리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된다. 한 생명을 책임져야 한다. 키워야 한다. 가르쳐야 한다. 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


수진은 내 옆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손을 배에 올리고. 그 배 속에 우리 아기가 있다.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진의 배에 손을 올렸다.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 있었다. 우리 아기가.


“잘 자라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지켜줄게.”


임신 기간은 길고도 짧았다. 수진은 입덧이 심했다. 매일 아침 화장실에서 토했다. 나는 수진의 등을 쓰다듬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무력했다.


“괜찮아요. 엄마들 다 이런대요.” 수진이 말했다. “아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배가 점점 불러왔다. 삼 개월, 육 개월, 구 개월. 수진은 배가 커질수록 행복해 보였다. 배를 쓰다듬으며 “우리 아기, 건강하게 자라고 있지?“라고 말했다.


병원에 정기검진을 갔다. 초음파로 아기를 봤다. 작았다. 정말 작았다. 하지만 심장이 뛰고 있었다. 또각또각, 빠르게.


“건강해요.” 의사가 말했다. “잘 자라고 있어요.”


수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 울컥했다. 우리 아기. 정말 우리 아기가 있구나.


“성별 알고 싶으세요?” 의사가 물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알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 “당신은요?” “나는 당신 하고 싶은 대로.” “그럼 알아요. 궁금해요.”


“딸이에요.” 의사가 말했다.


딸. 딸이라니. 나는 딸의 아버지가 되는구나.


“이름 뭐로 할까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수진이 물었다.


“당신이 지어요.”


“같이 짓고 싶어요.”


우리는 몇 주 동안 이름을 고민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았다. 결국 ‘지우’로 정했다. 지혜롭고 우아하게 자라라는 의미였다.


지우


2002년 늦가을, 지우가 태어났다. 새벽 두 시였다. 수진이 진통을 시작했고 우리는 급히 병원으로 갔다. 분만실 앞에서 나는 기다렸다. 안에서 수진의 비명이 들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대신 아파주고 싶었다.


세 시간 후, 간호사가 나왔다. “딸 낳으셨어요. 산모도 아기도 건강해요.”


나는 분만실로 들어갔다. 수진은 땀범벅이 되어 누워 있었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품에 작은 아기를 안고.


“우리 딸이에요.” 수진이 말했다.


나는 다가가 아기를 봤다. 작았다. 정말 작았다. 쭈글쭈글한 얼굴, 꼭 감은 눈, 작은 손. 아기가 하품을 했다. 작은 입이 크게 벌어졌다.


“안아볼래요?” 수진이 물었다.


“떨어뜨릴까 봐 무서워요.”


“괜찮아요. 조심히 안으면 돼요.”


나는 조심스럽게 아기를 안았다. 가벼웠다. 솜털처럼. 하지만 따뜻했다. 살아있었다. 숨 쉬고 있었다.


“안녕, 지우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야.”


그 순간, 모든 것이 변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나는 더 이상 그냥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작은 생명을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였다.


지우는 밤마다 울었다. 배고플 때, 기저귀가 젖었을 때, 그냥 안아달라고. 나와 수진은 교대로 지우를 돌봤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하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이것이 부모가 되는 것이니까.


백일잔치를 했다. 작은 파티였다. 양가 가족과 친한 친구들만 초대했다. 지우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분홍색 한복. 너무 예뻤다.


“정말 예쁘게 생겼네요.” 사람들이 말했다. “아빠 닮았어요? 엄마 닮았어요?” “엄마 닮았어요.” 나는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지우는 수진을 닮았다. 다행이었다.


첫돌잔치도 했다. 돌잡이에서 지우는 책을 집었다. “똑똑하게 크겠네요.” 사람들이 말했다. 나는 자랑스러웠다. 우리 딸.


현수


지우가 두 살 되던 해, 수진이 다시 임신했다. 이번에는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당황하지 않았다. 경험이 있었으니까.


“또 딸이면 좋겠어요.” 수진이 말했다. “지우랑 자매였으면.”


“아들이어도 좋아요.”


“그것도 좋죠.”


이번에는 아들이었다. 현수. 현명하고 빼어나라는 의미였다.


현수는 2005년 봄에 태어났다. 지우처럼 새벽에. 하지만 이번에는 더 빨랐다. 진통 시작하고 한 시간 만에 태어났다.


“아들이에요.” 간호사가 말했다.


아들. 나와 같은 성별의 아이. 아들을 키우는 것은 딸을 키우는 것과 다를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대됐다.


현수는 지우와 달랐다. 조용했다. 잘 울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잤다. “순한 아기네요.” 사람들이 말했다.


지우는 동생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질투했다. “엄마, 나만 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현수를 사랑하게 됐다. 현수 옆에 앉아 “동생아, 누나야”라고 말했다.


우리 가족은 넷이 됐다. 작은 집은 더 비좁아졌다. 하지만 더 따뜻해졌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지민


현수가 세 살 되던 해, 수진이 또 임신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수진이 말했다. “셋이면 충분해요.”


“그래요. 셋이면 딱 좋아요.”


이번에도 딸이었다. 지민. 지혜롭고 민첩하라는 의미였다.


지민이는 2008년 가을에 태어났다. 막내딸. 우리 집의 막둥이.


지민이는 특별했다. 태어날 때부터 웃었다. 간호사들이 신기해했다. “이렇게 일찍 웃는 아기는 처음 봐요.”


지민이는 자라면서도 계속 웃었다. 항상 행복해 보였다. “천사 같아요.”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다섯이 됐다. 나, 수진, 지우, 현수, 지민이. 작은 집은 이제 정말 좁았다. 큰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나는 더 열심히 일했다. 승진했다. 월급이 올랐다. 우리는 돈을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아파트를 샀다. 우리 소유의 집. 처음으로.


“우리 집이에요.” 수진이 말했다. 눈물을 흘리며. “정말 우리 집.”


아이들은 새 집에서 뛰어다녔다. “우와!” 지우가 외쳤다. “내 방이 있어!” 현수도 따라 외쳤다. “나도!” 지민이는 깔깔 웃었다.


그날 밤, 아이들을 재우고 수진과 나는 거실에 앉았다. 조용했다. 평화로웠다.


“행복해요?” 내가 물었다.


“너무요.” 수진이 대답했다. “당신은요?”


“나도요. 정말 행복해요.”


우리는 손을 잡았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했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가족이 함께하는 순간들을.


가족이라는 우주


결혼하고 가족을 만든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둘뿐이었다. 수진과 나. 두 개의 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의 우주는 확장됐다. 지우가 태어나고, 현수가 태어나고, 지민이가 태어났다. 다섯 개의 별이 하나의 은하를 이뤘다.


때로는 충돌도 있었다. 다툼도, 오해도, 상처도. 하지만 우리는 항상 서로에게 돌아왔다. 중력처럼. 서로를 당기는 힘이 있었으니까.


지금 돌아보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들은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다. 명절에 온 가족이 모여 밥 먹던 순간, 주말에 공원에서 소풍하던 순간, 저녁에 함께 텔레비전 보며 웃던 순간. 그런 평범한 순간들이 가장 소중했다.


이제 아이들은 다 컸다. 지우는 스물셋, 현수는 스물한 살, 지민이는 열아홉. 더 이상 아기가 아니다. 각자의 삶이 있다. 각자의 꿈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가족이다. 우리의 우주는 여전히 존재한다. 조금 멀어졌을 뿐. 별들 사이의 거리가 조금 넓어졌을 뿐.


언젠가 나는 떠날 것이다. 이 우주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만든 이 우주는 남을 것이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 수진의 마음속에.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했고, 가족이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