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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유히 Sep 25. 2023

큰 집 K-장녀, 명절만 되면 표독스러운 딸로 변하다

올 추억엔 엄마와 나를 찾지 마세요.


나는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엄마도 그렇다. 엄마에겐 시댁이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한다. 아빠는 5남매 중 장남으로 우리 집이 큰집이라 명절이 되면 친가 식구들이 모인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은 삼촌들이 계셔서 그렇게 북적거리지 않는다. 즉 명절 준비를 하는 일손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엄마는 아빠를 만나고 나서부터 이전에는 고모할머니가 진행했던 제사와 차례를 홀로 맡게 되었다. 그 당시 엄마 나이가 20대 초중반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명절 차례상은 엄마가 항상 준비했으며 나도 옆에서 함께 했다.

10대 땐 튀김을 튀기고 전을 굽는 게 마냥 재밌기만 했다. 어른들의 칭찬과 용돈이 한몫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머리가 자라 20대 중반 때부터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왜 우리 집은 엄마와 나만 명절 준비를 해야 하는지. 이 집 남자들은 뭐 하는 건지. 제일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아빠였다. 명절만 되면 삼촌들과 낚시를 갔고 고기를 잡아와서 일을 더 만들었다. 나는 점점 심술이 났다. 친가 어른들의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와 나, 우리 둘만 왜 이렇게 명절 노동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명절엔 늘 아빠에게 언성을 높였고 서로 감정이 상할 만큼 막말을 주고받았다. 제사를 없애면 안 된다는 게 아빠의 주장이었다. 그 주장 속엔 가족들과의 만남(술자리)이라는 주된 이유가 있었다. 아빠는 명절 노동에 대한 수고스러움은 전혀 헤아리지 않았다. "그럼 아빠도 낚시 가지 말고 콩나물 대가리 따고 새우 껍질 벗기고 전 부쳐. 이게 도대체 누구 제사야?!!!" 화가 난 채로 한마디 외치면 아빠는 더 큰 목소리로 윽박을 지른다. 아, 오해할까 봐 말하지만 나는 명절 한정 표독스러운 딸일 뿐 평소엔 낚싯대를 선물하는 딸이다. K-장녀로서 엄마가 독박으로 수십 년간 명절을 준비하는 걸 보면 뒷골이 땡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들이 질려서 명절엔 나 몰라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를 생각하면 그러기 쉽지 않다. '내가 진짜 엄마만 아니면 이 짓 절대 안 해. 어휴'하며 분노가 가득한 채로 새우껍질을 깐다. 정말 마지못해. 제사를 없애고 가족끼리 외식을 하거나 여행을 다녀오면 얼마나 좋을까?

명절 때면 나는 항상 음식을 하는 도중 친척들을 맞이해야 했다. 그럴 때면 부침가루와 기름 범벅이 된 못난 상태의 내 모습을 보이는 게 싫었다. 나도 예쁘게 차려입고 가족들을 만나고 싶지,  꼬질꼬질한 상태에서 다른 친척과 비교를 당하는 것도 싫었다. 어쩔 땐 억울하기까지 했다. “너도 00처럼 예쁘게 입고 좀 꾸며봐”, “00는 아가씨가 다 됐네~” 하며 내가 구운 전을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짜증이 치밀었다. 이건 아마 나만 그런 게 아닌 대부분의 제사를 지내는 K-장녀라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이 하나둘씩 쌓이고 곪아 지금의 내가 되었다. 추석을 앞둔 9월, “이번에도 제사 지낼 거야?” 하며 엄마에게 넌지시 물었다. 엄마는 올 추석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을 거라고 했다. 올해 4월, 친가의 제일 어른인 고모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엄마도 최근에 팔을 크게 다쳤기 때문이다. 엄마가 다쳐서(차례상 준비를 할 사람이 없어서) 제사를 하지 않는다는 게 너무 웃기다. ‘그럼 도대체 이 제사는 누굴 위한 걸까?’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엄마는 내가 명절만 되면 예민한 걸 알아서인지 올 추석엔 여행을 다녀오라고 했다. 여행을 가면 좋겠지만 팔이 불편한 엄마를 두고 어떻게 맘 편히 떠날 수 있을까? 제사 음식을 준비하지 않을 뿐 가족들을 맞이하며 분주히 움직이는 건 똑같기에 마음이 좋지 않다.

 4년 전 추석, 혼자 호텔에 간 적이 있다. 이건 내 나름의 반항이었으나 하루종일 마음이 무거웠다. 책을 읽어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뭔지 모를 죄책감만 물 밀듯 들어왔다. 그 누구보다도 제사를 지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은 엄마일 텐데. 혼자 부엌에서 바삐 일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갑갑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엄마를 혼자 두지 않게 되었다.

사실 제사를 지내는 게 싫진 않다. 다만 다 같이 참여했으면 하고 밥상 앞에서 남녀를 구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상님들도 수십 년간 똑같은 튀김과 조기만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분명 조상님들도 마라탕과 탕후루를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런 열린 생각으로 엄마의 희생 없이 명절을 함께 즐겼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은 전혀 조율이 안 되는 게 아쉽다.

올 추석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솔직히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다 집어치우고 엄마랑 단 둘이 여행이나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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