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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posa May 25. 2021

세르반테스 모범 소설 - 유리학사

「유리 학사,El licenciado vidriera」를 읽고


‘그는 검사와 변호인들의 태만과 무지를 비난했다. 그들을 의사와 비교하면서, 의사가 환자를 완치시키든 못 시키든 자기 몫을 가져가듯, 검사와 변호인들도 자기들이 돕는 소송에 이기든 지든 자기 몫을 챙겨간다고 했다.’ 


토르메스 강변을 지나던 두 대학생 신사가 주인공 토마스 로다하를 발견한다. 그는 고향 땅 이름은 잊어버렸고 살라망카에 일자리를 찾아가는 중이라고 말하지만, 그가 머리가 나빠 고향 이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신사들은 그가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고 하는 것에서 이미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과 부모님의 이름을 빛낼 때까지는 누구나 자신의 부모님이나 고향 이름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공부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다. 두 신사는 그 대답에 감동을 받고 그를 데려갔으며, 그 기대에 부흥하듯 그는 8년 만에 뛰어난 기지와 능력을 발휘하며 유명해진다. 


그는 도중, 돈 디에고 데 발디비아라는 보병 대위를 알게 된다. 그가 말하는 군인 생활의 자부심과 용맹함은 그를 흔들어 놓았고, 해외 파병으로 인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 확신했던 토마스는 학생복을 벗어버리고 호화롭고 용맹스러운 군인의 복장을 하게 되었으며 카르타헤나로 떠나게 된다. 군대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폭넓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도왔으며 매일매일 새롭고 즐거운 일과 부딪히게 된다. 바닷가를 따라 형성된 어촌 마을의 기묘한 생활, 거대한 폭풍과 풍랑의 공포스러움, 달콤하고 씁쓸한 끝없이 늘어진 포도주의 맛과 더불어 금발의 우아한 제노바 여인들 그리고 도시의 빼어난 아름다움이 그를 채웠다. 그를 충동질했던 욕망이 채워지자 그는 다시 스페인의 살라망카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했고, 한 여인이 그를 유혹하기 위해 ‘사랑의 묘약’을 그에게 먹이지만, 심한 부작용으로 그는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사실 본격적인 유리 학사의 내용은 지금부터 시작된다. 부작용으로 인해 그의 몸이 유리로 되어 사람들이 다가오기만 해도 벌벌 떨며 자신에게 떨어지라고 소리쳐 대는 그의 행동은 놀랍고도 또 신기하다. 신기하다는 표현보다는, 다른 면에서는 독특하고 아름답다. 유리는 아주 약하고 투명하며 자신이 품고 있는, 자신이 투여하는 모든 사물을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자신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말하며 그동안 쌓은 모든 경험과 생각들, 그의 박식함과 재능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마치 정말로 그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그의 안에 내재된 모든 것들을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순사들에 대해서는 사람을 체포하고 집에서 재산을 빼앗고, 감시하기 위해 집에 사람을 가두고 그것을 대가로 먹고사는 것을 일로 삼는 고로 얼마간 적을 갖게 되는 별날 것이 없다고 말한다. 하루는 그가 목에 벌이 쏘이자 깨어질까 봐 감히 뿌리치지는 못하고 투덜거리만 한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몸이 유리로 되어 있는데 어떻게 벌이 쏘는 것을 느끼냐고 묻는다. 그는 그 말벌이 험담가임에 틀림없다고 대답하며 험담가들의 말과 주둥이는 유리로 된 것뿐만 아니라 청동으로 된 육체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고 덧붙인다.


그가 유리로 된 몸을 가진 후, 그가 가진 모든 지식들을 투명하게 내비치자 구름처럼 사람들을 몰고 다닌다. 그가 유리로 되기 전에는 학식을 지닌 유능한 인물로 국한되었을지라도 그는 이제 ‘유리’로 된 인간이기에 그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은 그에게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 몰려왔고 심지어 왕궁의 귀족조차 그를 불러들인다. 

그의 이런 ‘미치광이 병’은 2년 정도 지속되었고 그러던 중 벙어리를 듣게 하고 심지어 말하게 하며 미친 사람을 치료하는 특별한 지식과 은사를 받은 성 제로니모 교단의 한 성직자가 치료를 맡아 그 자비의 힘으로 유리 학사의 병을 고친다. 그는 로다하가 아닌 자신을 루에다 학사라고 부르며 다시 궁정으로 돌아가지만, 더 이상 ‘유리’로 된 몸을 가지지 않은 그는 사람들에게 외면받는다. 


이 소설에서 ‘유리’라는 물질이 우리에게 전하는 바는 크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넓고, 방대하고 유능하다고 해도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의 지식을 투명하게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는 ‘유리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로 인한 적을 조심하고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숨기거나 혹은 부풀려 거짓되게 말하는 우리의 삶은 유리 학사와 상반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유리로 만든 인간은 자신의 외부가 깨질까 두려워하지만 인간은 우리의 내면이 깨질까 겁에 질려하는 모습이 흡사하기도 하다. 내가 유리로 만든 인간이었다면, 나 역시 외부를 신경 쓰기 위해 내 정신과 마음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뱉을 수 있었을까? 말로 인한 적을 두고, 그 적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세르반테스는 유리 학사를 통해서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이상적인 모습을 구현하지만, 결국 그가 병이 낫고 제자리로 돌아갔을 때 외면받는 현실을 보여주며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Espero que tengan que leer más.

Que sientan muchas emociones. Despúes de leer este li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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