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학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이다.
사랑은 지극한 환상인 동시에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환상을 생각하면 보통 불가능하고, 터무니없으며 지극히 상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통 우리는 말이 되지 않은 불가능한 상황을 볼 때, ‘와 환상적이다!’라고 외치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지극히 환상적인 삶 속에 있다. 예컨대 우리는 아침에 거울을 보고 외출을 한다. 옷매무새를 다듬고, 헤어스타일을 마음에 들 때까지 고치고 자신이 가장 완벽하다고 생각할 때 거울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금 다른 거울에 서기 직전까지 우리는 아침에 보았던 그 거울 안의 완벽한 자신을 상상하며 거리를 활보한다. 그러나 다시 다른 거울 앞에 선 우리는, 우리의 환상과는 다르게 머리는 헝클어졌으며 옷에는 얼룩이 묻어 있는 경우가 많고, 표정도 굳어있다. 다시 거울 앞에 선 우리는 환상 속의 나를 만들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환상으로 가득 차있다.
그래서 문학이란 사랑이자, 우리가 경험해 볼 수 없는 많은 사랑을 지닌, 피를 흘리지 않고 세계를 보는 지침서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랑을 경험해보고, 진정한 사랑을 모든 사람과 느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그래서 문학이 존재한다.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으며 잊고 있던 사랑에 대한 나의 환상과 무한한 상상력, 아름다움을 느꼈다. 그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이 소설에서 펼친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혹은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지극히 환상적인 내 사랑의 감정이었을까.
나의 아흔 살에게
‘서글픈 언덕’이라고 불리는 소설 속 남자는 이제 아흔 살이 된다. 아흔 살은 나에게 너무 먼 미래 같지만, 그가 말하는 아흔 살은 그리 멀지 않다. 아니, 오히려 실감이 난다. 늙는다는 것은 자신의 부모와 닮아가는 것이며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을 남들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아흔 살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은가. 소설 속 남자는 자신이 아흔 살이 되어 가장 먼저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떠올린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중략) 오늘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그러니까 나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겠다고 결심하는 순간까지 그래 왔다. 나는 오직 나를 짓누르고 있던 의식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죽어 있을 나이에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던 것이다.」
나는 과연 내 삶을 다시 시작하는 첫걸음이 아흔 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일명 ‘서글픈 언덕’은 자신을 매우 잘 아는 사람이다. 항상 관습적인 것을 고집해왔고 외모적인 부분에 대한 콤플렉스와 자신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그것과 반대로 행동하며, 자신이 가진 생각들과 관습들을 깨지 않게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에게는 아흔 살은 새로운 시작이자 진정으로 자신이 바라 왔던 욕망을 실현하는 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나는 과연 아흔 살의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아흔 살이 된다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그것은 결단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흔 살의 나로서 생각해보려 한다.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평화로운 죽음의 밤을 나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나는 지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죽음의 공포와 삶의 의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조용하고 차분하게 만들고 싶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나는 세상을 열심히 살았으며 누구에게 미움받는 일도,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도 싫어했다. 항상 남들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진정한 나의 행복과 욕망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다. 그로 말미암아 나는 대부분의 타인에게 미움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 아흔 살이 되는 오늘,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삶 전체에서의 나를 돌아보며 아주 평화롭고 고독한 죽음의 밤을 나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죽음만이 오직 스스로에게 내릴 수 있는 선물이었으므로.」
나는 ‘서글픈 언덕’과는 다르게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밤을 아흔 살의 나에게 선물하고 싶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집단 안에서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소통하며 살아가므로 내가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스스로 사랑할 기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의식하며, 남들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삶 안에서 나는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다. 기준점은 항상 남들의 시선에 머물러 있으며 끊임없이 높아지고 자신에 대한 한계는 늘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현재의 나는 아흔 살의 나에게 평화로운 죽음의 밤을 선물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나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나를 위한 시간을 보낸다면 나의 아흔 살에게 보내는 첫머리는 아마도 죽음의 밤이 아닌 평화롭고 한적하며 그날의 새벽의 공기를 맡을 수 있는 보통의 밤으로 시작했을지도. ‘서글픈 언덕’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게 매우 솔직했으며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기에 아흔 살의 자신이 새로운 삶을 시작해 다시 한번 사랑을 하고, 그 사랑으로 아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시작해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죽을 수 있는 행운이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