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책 읽는 것을 좋아했다. 6살 때였나, 어느 날 엄마가 카세트테이프와 책을 사 주셨다. 빠듯한 살림에 자식 교육에 관심이 있던 엄마는 당시 꽤나 큰돈을 들여 전집 세트를 마련하셨다. 운이 좋게도 난 엄마가 만족할 만큼 카세트 음원을 들으며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때가 책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날이었다. 분야는 가리지 않았다. 전래동화, 역사, 탐험, 과학 등 다양한 책들을 탐독했다. 유치원을 갔다 오면 저녁밥을 먹기 전까지 라디오에 카세트를 넣고 성우가 들려주는 목소리에 따라 책을 눈으로 스캔했다. 글자는 잘 몰랐지만 음원의 효과음에 맞춰 책을 읽었다. 엄마 말로는 처음 언 그림만 보다가 어느 순간 책에 있는 글자를 보고 있더란다. 그 후 엄마는 내가 영재인 줄 알고 선행학습을 시켜봤지만 잘 따라 하지 못해 많이 답답해하셨다. 꿀밤을 많이 맞았다. 엄마는 '아니, 책을 많이 읽었으면 공부를 잘해야 하는 거 아니니? 왜 이렇게 문제를 못 풀어?!!'라며 나를 타박했지만, 어쩌겠나. 유치원생한테 초등학교 3학년 수준의 문제를 풀어라는데 잘 푸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
결국 초등학교 입학을 하고 나서야 이상한 선행학습은 그만두었고, 방과 후 피아노 학원만 다니기로 했다. 평소에는 학원을 갔다가 동네 친구들이랑 강으로 논으로 밭으로 돌아다니다 가끔 놀만한 친구가 없을 때면 허름한 방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 또 자식 교육에 열정이 많은 엄마는 위인전 전집을 샀고, 나는 또다시 엄마가 만족할 만큼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엄마가 강제적으로 시킨 건 절때 아니고 그냥 책 내용이 재밌어서 여러 번 읽었다. 글과 그림으로 만나는 위인의 삶이 신기했고 나와 문화권이 다른 사람들의 생활양식을 그림으로 관찰하며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당시 우리 집은 워낙 낡아 TV나 냉장고 같은 전력 소모가 많은 가전제품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그럴 때마다 위인전 전집을 내 옆에 잔뜩 쌓아놓고 지루한 시간을 달래고자 읽고 또 읽었다. 재독 횟수가 20번은 족히 넘었을 것 같다. 28살인 지금 아직도 그 책의 내용과 그림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초등학교 때 도서관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장소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10권이 넘는 소설 전집을 다 읽고, 1000페이지가 넘는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으며, 웬만한 학습 만화는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20권 정도 되는 시리즈 만화인 <그리스 로마 신화>는 거의 5번 정도 읽은 기억이 있다. 덕분에 지금까지 그리스 신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름만 부르면 다 알 지경이 되었다.
중학교 때는 성장소설과 <살아남기 시리즈> 만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생 때부터 입시라는 쓸데없는 압박 때문에 책을 점점 놓게 되었고, 대학 때 책을 다시 쥐어보려 했지만 다른 재밌는 것들이 너무 많아 그러지 못했다. 졸업 후에도 간간히 책은 읽었지만 본격적으로 다시 제대로 독서하기 시작한 건 작년이었다. 책만 읽지 않았다. 책을 읽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
기록이 주는 힘은 놀라웠다. 처음에는 단순한 독후감 수준이었다면, 시간이 갈수록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생기고, 생각이 깊어지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가의 주장에 의문을 품기도 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외워서 얻은 가공된 지식이 아닌 내가 스스로 얻은 날것 그대로의 지식을 얻게 되었다. 마치 수렵채집인이 사냥감을 잡은 것처럼 말이다.주제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한 개인으로 성장하는 기분이 들었다.
요즘은 모든 감각을 빼앗는 즐거운 것 (쾌락에 가까운)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더욱 독서하기 힘든 것 같다. 그러나 짧은 즐거움을 주는 것들은 나의 내면을 채우지 못한다. 오히려 그것을 다 즐기고 나면 공허한 마음만 들뿐이다. 하지만 독서는 온전히 단독자로서의 나와 마주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줄 것이고,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가 나의 빈 마음을 채워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