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이곳에 모시고며칠 뒤, 나는 패랭이와 꽃잔디, 키가 낮게 자라는 향나무 두 그루를 이곳에 심었다.
한 여름 뙤약볕에 죽어가는 줄 알았던 패랭이가 기특하게도 꽃을 피우고 작은 꽃망울을 올리고 있었다.
“ 저번에 왔을 땐 꽃 잔디가 흐드러졌었는데,
이제 다 져버렸네…”
자전거 뒷자리에서 3년간 바라본 그의 등
중학교 1학년부터 3학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는 자신의 삼천리 자전거에 나를 태워 제법 무거웠을 어리지도 않은 나를 3년 동안매일같이 등교시켜 주었다.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가며 학교 도착하기까지 바라보던 풍경과 그의 등, 바람에 실려오는 그의 땀냄새, 도착 후 교문 안으로 들어가 내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그날 아침처럼 지금도 눈에 선하게, 움직이는 그림처럼 흘러간다.
아버지의 고향은 항구도시 오노미치였다. 그곳에서 나고 자라 17살 농림고등학교 시절 방탕한 큰아버지의 꾐에 고향을 떠나, 10대 후반을 중국에서, 해방 후에는 해주와 인천을 오가며 중계상을, 6.25 무렵에는 서울에서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순창, 담양과 같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30대 중반에서야 늦은 결혼을 했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오랜 세월 직장 때문에 멀리 가족과 떨어져 타향살이를 하셨다. 아버지가 집에서 출퇴근을 했던 기억의 시작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였다. 오랜 세월 그렇게 가족과 떨어져 홀로 살다 보니, 천성이 그래서인지 살아온 환경이 그래서인지 어찌 보면 무던하거나 무심해 보였다.
주위 사람들에게 부처님 같다는 소리를 듣는 그였지만, 가족들에게도 너무 조용하고 온화해 묵언수행하는 수도승 같았다.
이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무던하고 무심한 남자처럼 보였으리라.
하지만, 아버지는 착하고 정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다.
철이 들어 나이 들어감에, 어머니의 레퍼토리에서 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의 근원을 어렴풋이 이해할 듯도 했었다. 하지만 최근까지 이런 어머니를, 나는 철이 들어서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아버지를 원망하는 어머니를 청소년 반항기부터 몇 년 전까지 야속해하고 한편으로 미워했었다.
내가 아버지의 무던함을 닮았다는 것을 서른이 넘어서야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무던했고, 무심하고, 거기에다 용기까지 없었다.
내게 너무 집중했던 삶.
40대에 들어서며 중년은 희생의 삶이라 생각했다.
가족을 위한다며 앞만 보고 내달렸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은 오로지 내게만 집중했던 삶이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활이 반복되자 번 아웃이 왔고, 결국 중년은 희생의 삶이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자리 잡았다. 그러기 시작하자, 작은 일에도 가족들에게 섭섭함을 쉽게 느꼈다.
서로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해나가는 것인데, 대부분의 가장이 나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 텐데, 내가 무슨 특별한 희생을 했다고? 내 나이 앞에 4자가 지워지고, 5자가 붙기 시작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들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참 많은 사람이 아팠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가끔은 돌아가신 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다가 투정도 부려본다.
아버지는 패랭이 몇 송이 머리에 이고 망월동 어딘가쯤
조그만 향나무 아래에서 산들바람 맞으며 막둥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있다.
그의 삶은 대하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만큼 파란만장했었다.
93년 그 기나긴 삶을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로서는 가늠이 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범부의 삶에도 이리도 힘들어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