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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뭐라카노 하루끼 Jun 22. 2023

7 병동에 대한 편견 (1)

정신분석학과 심리학 책을 읽게 된 계기

도망자?


19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햇살 좋던 토요일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나는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시장길 한가운데를 미친 듯이 뛰어가고 있는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복잡한 시장통 길가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뛰어가고 있었다. 사람들과 부딪치고 넘어져서 구르고, 바로 일어나 다시 뛰다 넘어지고 다시 뛰기를 몇 차례, 그 모습은 절박해 보였다. 그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하느라 그 복잡한 시장통에 작은 소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도망자 같았던 그의 뒷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듯도 했지만 버스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서 자세히 보지 못해 크게 마음 쓰지 않았었다.



다음날 아침즈음 절친한 친구의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친구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그 복잡한 길 한가운데를 쫓기듯 미친 듯이 뛰어가다 구르고 다시 일어나 처절하게 도망가던 뒷모습의 사람이 바로 내 친구였던 것이다.


" 왜? 그 애가..."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최근 신경안정제를 꾸준히 처방받아먹었던 것이 기억났고 이내 왜 그가 병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 날을 계기로 나는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친구가 왜 그랬을까,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쩌면 이해하지 못해 이해해 보려고 했던 그저 작은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친구의 누나



내 친구의 누나와 나는 꽤나 친하게 지냈었다.


나보다 2살 많았던 누나는 음악을 정말 좋아하고, 가사를 하나하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지녀 아직은 소녀티를 벗어나지 못한  서태지를 애정하는 하얀 얼굴을 가진 20대 초반의 사람이었다. 친구 누나와도 많은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에, 그 누나의 상실감의 근원을 나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교육 공무원이셨고 신사지만 엄격한 아버지, 시를 사랑하는 감성적인 어머니 아래 자랐지만, 어릴 적 잦은 이사를 경험한 탓에 친구를 사귀면 헤어지고, 친구를 사귀면 헤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학교에 적응을 잘하지 못한 아픔을 갖고 있었다. 그것에 대해 아버지에 대한 일종의 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누나는 우울증을 오래전부터 앓고 있었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다.

누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만 자살시도를 몇 번인가 했었고, 내 친구는 그때의 광경들을 두 번인가 직접 목격해야만 했었다. 그래서인지 내 친구는 어느 때부턴가 신경 안정제를 처방받아 꾸준히 먹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누나의 방문을 열거나, 욕실 문을 여는 게 너무 공포스럽더라."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내가 그의 마음을 더 따듯하게 안아주었나라는 반성과 함께 그의 누나의 죽음이 떠올라 그 말을 떠올리면 목구멍에 울음부터 차올라온다. 그의 누나는 자신의 동생이 입퇴원을 반복하자, 그 부담이 더해졌는지  몇 년 뒤 결국은 이 세상을 떠나는 데 성공해버리고 말았다.



제7 병동


  나는 대학병원에 입원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누나가 알려 준 대로 방문 예약을 하고 정신병동으로 면회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입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면회는 가능하지 않았고 1주일 정도를 기다린 뒤에야 면회가 허용되었다.


갑작스러운 통증으로 인해 실려오거나, 혹은 삶의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있는 환자들이 앰뷸런스에 실려 오는 곳. 삶이 힘들다 느껴졌을 때 나는 굳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대학병원 응급실에 들렸다. 나는 가끔 이곳에 들러, 지금 내가 숨 쉬고 있음에 안도하고 내 두 발로 이 땅을 밟고 서있음에 감사해했다.  


그곳을 가기 위해 지나다니던 익숙한 거리를 지나, 풍채 좋은 몇 그루의 소나무들에 둘러 쌓인 응급실을 뒤로하고, 좌측으로 쭉 돌아나가니 끝자락 깊숙한 곳에 하얀 건물이 서 있었다. 모두 흰색 건물인데, 유독 더 하얗게 느껴진 건 그저 강화된 내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마주한 거대하고 비밀스러운 흰 건물의 꼭대기쯤에는 커다랗게 검은색 페인트로 7 병동이라는 레터링이 쓰여있었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7 병동은 정신병동을 지칭하는 의미로 많이 쓰였는데,  " 그런데, 굳이 왜 7 병동이라고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 건물에 들어섰던 것 같다.


   

입원실로 통하는 테라조로 된 계단 주변의 공기는 꽤나 서늘했었고, 그 계단의 끝에는 금단의 영역을 지키는 성문처럼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차디찬 공기와 함께 사람을 굴복시키는 기운마저 뿜어 내고 있던 그 철문에는 어울리지 않게 흰색의 앙증맞은 작은 인터폰이 달려있었다.


인터폰을 누르자, 여성 간호사가 누구를 면회와러 왔는지, 어떤 관계인지 물어보고,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하지만, 철문을 열어준 사람은 남자 간호사였다.


입원실로 가기 위해 1층 정도를 더 걸어 올라가야 했다. 남자 간호사를 따라 그 짧은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입원실은 어떤 모습일까. 내 친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환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스무 살 되지 않던 인생에서 봤던 수많은 스릴러 영화의 모습들이 떠올라었다.



뜻밖의 풍경    


계단의 끝을 올라 입원실 복도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돌려, 복도 시작과 끝부분을 빠르게 스캔을 했다.

이때 내 머리 떠오른 것은 의외의 문장이었다.


"아~ 이런 따듯한 분위기였구나."


교실 특유의 냄새는 없었지만,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와 같은 느낌의 복도였다.

여러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붙어 있는 보드판, 칭찬하기 릴레이인 듯 보이는 누군가를 칭찬하는 문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넓은 로비에서 탁구를 치는 모습, 책을 읽는 모습, 소파에 앉아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 자유스럽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다른 곳에 별도의 폐쇄병동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곳은 개방병동인 것 같았다. 의외의 따듯한 공기에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내 앞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멈추더니 나를 바라보며 갑자기 손을 앞으로 치켜들며 이렇게 외쳤다.



"하이! 히틀러"



"..... "



내가 당황해 쭈뼛거리며 머뭇거리는 동안, 얼굴이 하얗고 길쭉했던 그 사람은 부끄러웠던 것인지, 아니면 바빠서 다른 용무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눈길을 피하고 종종걸음으로 입원실로 보이는 방으로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사라진 문 반대편에서 낯익은 모습의 얼굴이 나타났다. 내 친구였다.


" 괞찮아? 여긴 어때?"


 그런 질문을 던진 나를 보고 친구는 실실 웃기만 했다.


"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더라. 처음엔 무서웠는데 보다시피 이런 곳이야."


내가 가지고 있는 일말의 편견을 내보였나 싶어, 후회스럽기도 부끄럽기도 했다.

맞다. 그에게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 오느라 고생했겠네. 이곳에 오기 쉽지 않았을 텐데. 다른 친구들은 한 명도 안 왔다. 네가 처음이다. "


내가 그냥 웃어넘기자. 친구는 말을 그대로 이어갔다.


" 여기에 오래 있던 환자들과 처음 들어온 환자들이 달라 보이더라. 처음엔 뭐가 다른지 잘 몰랐지.

저기를 잘 봐봐. 걸음걸이를 잘 봐. 어때? 뭔가 다르지 않아? 어깨를 앞으로 떨어트리고 걷잖아. 이곳에 들어와서 약을 먹기 시작하면 저렇게 돼. 하루종일 멍한 상태로 어깨를 늘어뜨린 채 저렇게 걸어 다녀. 나도 어느새 저렇게 다니고 있더라. "



보호실 그리고 징벌방



처음 본인이 들어갔었던 곳이라면서 그는 복도 가운데에 있는 작은 방 5개를 손으로 가리켰다. 케어룸으로 불리는 보호실. 그는 나를 데리고 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두 세평 정도의 작은 크기로 구석에 침대가 하나가 있었고, 특이하게 결박 끈이나 어떤 장치들 같은 것들이 보였다. 다리와 손을 묶는 용도로 보였다. 그리고 양들의 침묵에서 본듯한 특이한 결박용 옷 같은 것들도 보였다. 조명색도 다른 곳과 달랐다. 그리고 그중 한 룸에는 누군가 결박된 채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와 같은 분위기는 이내 공포스러운 분위기로 바뀌어버렸다.


흥분을 하거나, 공격성이 있는 환자들을 보호라는 명분으로 또는 케어하기 힘들다는 명분으로 그곳에 결박하고 약물을 투여해 진정시키는 방이었다. 친구가 입원했던 날, 왜 내가 이런 곳에 입원을 해야 하냐며 반항을 해서 저기에 묶이고 약물을 투여받았다고 했었다. 보호실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말로 감옥의 징벌방 같은 곳이었다.

 

친구는 집들이에 참석하러 온 지인을 대하 듯 본인이 입원해 있는 병동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설명을 해주었고, 가장 마지막으로 본인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4개의 침대가 있고, 사물함이 있었고, 창밖에는 창살이 있었다. 특이한 점은, 병실문을 안에서 잠글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내가 문을 바라보자 눈치 빠른 그 녀석은 이렇게 설명해 줬다.


" 이곳은 화장실도 저렇게 생겼어. 밖에서 문을 열 수는 있지만, 안에서는 문을 잠글 수 없어."


" 그렇구나. 야~ 그런데 나한테 하일! 히틀러라고 인사하는 사람이 있더라"


" 응. 그 형은 본인이 독일군이라고 저렇게 다녀. 하루에 몇 번씩 나에게도 그렇게 인사해. 그런데, 착한 사람 같아."



친구는 자신의 이야기보다는 이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 어떤 고통이 그들에게 있는지 자신이 들었던 내용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마 집단상담을 통해 들었거나, 기존 입원해 있던 다른 환자들에게 들었던 내용이었을 것이다.


퇴원 후 그 친구는 그곳에서 사귄 사람들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고, 나도 그들과 함께 만나 식사도 하고 당구를 치기도 하는 등 그들과 교류를 하곤 했었다.


내가 듣고 경험했던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핑계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이기적으로 희생을 강요하거나, 타인을 대놓고 욕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만약 본인에게 일어나는 여러 상황에 대해 별일 아니구나라고 무시하거나 다른 사람을 탓할 만큼 영악한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이 정신병동에 갇히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타인보다는 자신을  더 탓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피플이터라는  단어들과 너무도 먼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우리라는 피플이터들에 의해 가해를 받은  해자에 가까웠었다. 우리는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내 방식대로 사람을 대하고 상처를 주고 돌려받는다.

 

이 글을 쓰기위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파플이터가 절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살아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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