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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i Jul 13. 2018

취준생이 되어 돌아본 입시 준비생 시절

완벽하게 몰입했던 기억


대학교 4학년 공식적인 여덟 학기를 마쳤다. 아직 들어야 할 수업이 하나 남아있어 학생 타이틀은 간신히 달고 있지만 16년에 걸치는 교육 커리큘럼의 끝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이 '트루먼쇼(The Truman Show, 1998)'의 한 장면이라면 바다 끝 현실 세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서있는 - 딱 그 모습일 거다.


이제는 스스로 NEXT를 고민할 때가 되었다
이미지 - 트루먼쇼 (The Truman Show, 1998)


단순하게 '뭘로 돈을 벌어먹고살지?' 도 물론 생각하지만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고 있다.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지 어떤 것들에 관심을 두며 지금을 보낼지 또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등등.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직업과 직장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꼭 회사를 가야 할까?라는 질문에는 일단 가보고 싶고 경험해보고 싶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얼마 전 운 좋게 좋아하는 회사의 신입 공고를 발견했다.


지원을 해봐야겠다 마음먹은 지 5일째 자기소개서에 한 줄 조차 쓰지 못했다. 이력서,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자격증, 어학성적, 공모전 등 의식하고 취업준비를 하지도 않았거니와 너무 오래 무관심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시작부터 헤맸다. 그러다 내가 일반적인 취업시장에서 가치가 있을까? 자존감과 자신감, 확신이 떨어졌을 때 문득 서랍 정리를 하다 본 지난 나의 기록들에서 방황하고 있는 마음을 조금은 다스릴 수 있었다.



너는 꼭 하고 싶은 일을 해


두 언니들은 전교 1등을 밥 먹듯 했다. 감사하게도 부모님은 언니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았고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그저 항상 '하고 싶은 걸 해라' 그리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고) 재미있게 놀라'고 하셨다. 중학교 때는 말 그대로 정말 놀았고 고등학교 가서야 하고 싶은 일과 목표가 생겼었다. 교과목 공부보다는 광고라는 학문을 빨리 배우고 싶었고 자발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갇힐 수밖에 없는 지방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아등바등했다. 학교 안에서 광고, 디자인에 관심 있는 친구들 모아 이런저런 일들을 벌였고 밖에선 관련 책을 모조리 읽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로 전시회와 강연을 찾아다녔다.


고3 시절 야자시간에는 수능 대신 (입학사정관제 전형을 위한) 자기소개서와 포트폴리오 그리고 면접을 준비했다. 반에 있던 30명가량의 친구들과는 다른 고민을 해야 했며 다른 형태의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고민을 터 놓을 수 있는 친구들이 학교에 몇 없었고 나 또한 친구들이 한 두 문제 차이로 등급이 떨어져 속상해하거나 성적으로 스트레스받을 때 진심으로 위로할 수 없었다.


다행히 지금은 주변에 나의 고민을 '나의 입장에서'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불안함이 그때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주변 친구들과는 다른 것 같으니 이게 틀린 건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5년 전에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치열하게 몰입하던 나는 어떻게 생각했고 준비했고 꿈에 그리던 대학교의 광고홍보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되돌아봤다.




'점'이 모여 결국 '선'이 되는 것 -
그냥 흘러가는 대로 즐겼던 것 같다.


어떤 일을 치밀하게 계획해 이루어내는 스타일이 아니다. 순간순간 하고 싶은 일들을 하다 보니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져갔다. 지금과 동일한 것이 있다면 무언가 기획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더 생각 없이 즐길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생각만 하느라' 행동이 늦어지지 않았다. 현재의 내가 가장 조심해야 하며 고쳐야 할 태도다.

축제 홍보부 시절 제작했던 부채 (그림은 지금 자매상점을 함께 하고 있는 둘째언니가! - coconovation.com)
1) 여름이라 더웠고 2) 종이 팸플릿을 사람들이 다 버려서 - 아예 부채로 만들어버렸었다.


교장선생님이 부채를 들고 계신 모습


제작했던 축제 안내 어플리케이션

패기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뭘 안다고 부채 팸플릿도 모자라 어플을 제작했을까.

어플 안에는 사용 매뉴얼과 교장선생님 말씀, 공연장 배치도, 동아리 위치 안내 등의 콘텐츠를 담았었다.

탐색 메인에 노출되었던 프레지

재미로 만들기 시작했던 프레지. 덕분에 공모전에서 상을 타기도 창업자 피터알바이 앞에서 발표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도 있었다. 점들이 이어져 선이 될 수 있음을 이때 체감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프레지 창업자 Peter Arvai 앞에서 발표하던 모습
발표 이후 @Peter Arvai 가 남긴 트윗


가능한 많이
수집했고 분석했고 고민했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는 5년 전보다 지금이 훨씬 수월 할 텐데 당시의 내가 무언가 알아보는 것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혹시 놓치는 정보들은 없는지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 등 구석구석에서 가능한 많은 것들을 수집했었다. 또한, 그것들을 수용하려는 태도도 열려있었다. 지금은 되려 너무 많은 정보들을 접하기가 부담스러워 일부러 검색을 안 하기도 하는데 말이다.

또한, 정보들을 수집한 뒤 언제든 열어볼 수 있는 준비태세를 갖춰두었었다. 최근에는 바탕화면조차 정리하기 귀찮아 이런저런 기록들이 뿔뿔이 흩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기록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필요할 때 그것들을 찾아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도 참 중요한데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현실적으로 추릴 줄 알았다

가고 싶은 학교라는 열린 선택지를 두고 학과에서 뽑는 인원, 세부적인 전형, 지원 가능 여부 등 정보를 수집한 후 비교해 추리는 과정을 몇 번씩 반복했다. 지금은 당장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회사들에서 보통 어떤 자격을 요구하는지 채용절차가 어떤지 등 정성스레 알아본 적이 없다. 의지, 노력 모두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부족하다. 떠도는 고민들을 잡아 추릴 때가 되었다.


*당시 인터넷에 나오는 대학교 순위 이미지를 참고 적은 것입니다.

지원 가능한 학교들을 정리한 페이지 / 포트폴리오 구성을 고민하는 페이지


중앙대학교, 동국대학교 포트폴리오 표지



나에 대한
적어도 나의 노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가고 싶은 학교, 쓸 수 있는 전형에서 모집하는 인원을 모두 합쳐보니 대략 100명 정도가 되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을 수 있지만 불안할 때마다 이 생각으로 버텼다.

전국에 광고홍보학과 가고 싶어 하는 애들 중 내가 100등 안에 못 들겠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았다.


면접 준비를 할 때 예상되는 질문들을 자료별로 뽑아 보고 답변을 작성한 후 녹음했다. 그리고 그 파일을 노래듣듯 반복해 들었다. 자다가 물어보면 답할 수 있을 정도 질문하고 고민하고 답하는 연습을 꾸준히 했었다.


당시 준비했던 면접 질문들


고등학교 2,3학년 학생부 자율활동 기록

그리고 지방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항상 촉을 세워 새로운 것들을 자발적으로 찾아 나섰던 것 같다.


완벽하게 몰입했던 입시 준비생 시절의 내 기록들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시간이 흘러 많은 것에 욕심이 줄고 나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루지 않게 되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고민만 하지 말고 무언가를 시작해야 겠다. 그래야 아래의 화면들을 봤을 때 느꼈던 그런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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