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의 의사, 그리고 나의 진로

by 봄봄

오늘도 어김없이 오후 어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 같은 방향인 우리반 레바논 친구와 대화를 했다. 이 친구는 나이가 19살인가 20살인데 레바논 대학 2곳에 합격했지만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기 위해 이 곳으로 와 독어 공부를 하고 있다. 10월부터 RWTH에서 메디슨 공부를 할 예정이고, 학교에서는 A2까지만 독일어공부를 마치면 일단 입학 후 의과공부를 시작하며 계속 독일어 공부를 하면 된다고 했단다. 부럽군...

나는 RWTH 경영학 석사를 알아봤으나 독일어 C1 가 아니면 입학이 안된다는 답변을 들었는데..역시 문과와 이과는 다른건가. 게다가 여기 독일에서도 의대에 가려면 평균 평점 1점 (우리나라 기준 4.0) 이상이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아주 또리한 청년인 것 같다.


나는 경영을 전공해서 별달리 내 스페셜티가 없어 독어를 아주 잘하지 않으면 취업이 힘들것 같다고 말하니, 레바논에서도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경영이라고 대답하는 애들이 70%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런애들은 보통 아빠 사업 물려받거나 한다고. 그래서 자신도 본인 전문분야를 만들기위해 의대를 가려는 거고, 자기 아버지도 바이오 메케니컬인가 하는 공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UN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 우와..했다.


사실 아버지 하시던 회사를 물려받을 수도 있으나 본인은 자기힘으로 뭔가 이루고 싶기 때문에 그런 길은 가고싶지 않단다. 아니 이 어린나이에 이렇게 건실한 청년을 봤나... 철도 들고 영어도 잘하고 요래요래 대학교도 독일에 떡하니 붙어 열심히 언어도 배우고 말이야. 생각 똑바로 박힌 청년이 많은 나라의 미래는 밝은데 ..독일에 이런 똑디한 청년들이 많이 들어오면 앞으로도 더 발전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친구 말고 시리아에서 온 친구도 의대를 갈거라고 하던데, 요즘 독일에 정말 의사가 부족하긴 한가보다. 의대 졸업이 매우매우매우 어렵지만 졸업만 하면 의사는 부족직업군이라 직업을 못구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아는 의사가 1~2명 밖에 안되는 내가 이곳에 와서 알게된 한인들 중 의사가 벌써 6명 이상 되는 걸 보면 독일 이민 2세들에게도 인기있는 직업인 것 같고.


들어보니 독일의사는 한국의사와 달리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은 아니고, 사회적으로 Reputaion이 좋고 안정적인 직업이라고 한다. 그래도 일반 회사원보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일의 강도에 비해 페이가 높아지는 구조라고는 하는데, 의사가 너무 힘들고 돈을 많이 안주니 독일인 의사가 점점 줄어들고, 이에 따라 외국인들이 그 자리를 채우다보니 지인이 일하는 대학병원에도 외국인 의사가 매우 많다고. 그에 따라 의사소통 등의 문제로 의료의 질이 저하되는 문제도 발생한다고 들었다.


여튼 주변에 이렇게 어린 나이에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눈빛 빤짝한 청년을 보니,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돌아보게되더라.

내가 이 곳에 오기 전에 가장 많이 고민했던 문제가 사실 먹고사는 문제인데, 아무리 독일이 복지가 좋다한들 먹고사는 문제를 나라에서 다 해결해줄 수는 없지 않나. 그렇게 살고싶지도 않고.

정신 똑바로 박힌 시민이면 다들 자기 밥벌이 제대로 하면서 자신있게, 자유롭게 그렇게 살고싶을 거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과정에서 내 의지가 아닌 사회의 계급이나 편견이 의사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언제나 '내가 하고싶은 일'보다는 '내가 해야하거나, 하면 더 나은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해오곤 했다. 기본적 사회안전망이 없는 곳에서는 그게 더 안전했으니까.


이곳 유럽의 청년들도 당연히 더 나은 기회를 찾기 위해 독일로, 영국으로 가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부모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기회를 찾아 차근히 노력하며 일궈낸다는 점이 다른 것 같다. 나보다 한참 어리지만 빛이 나 보이고, 한편 그 독립적인 삶이 존경스럽기도 했던 이유가 그것이다.


난 이미 경영학 전공에 일도 꽤 오래해서 의학, 약학 등 전문분야 다시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다고 하니 그 레바논 청년 왈,

There's no 'It's too late'.

아.. 설득 당할 것 같아... ㅋ

그러면서 주변인들 얘기도 해준다. 느지막히 의사가 되었거나, 전공을 여러번 바꿨거나 한 사람들의 이야기.


여기 독일에서 내가 그동안 일했던 생명보험분야 일을 계속하는 것이 시간도 돈도 절약하는 길이라 생각했고, 만약 취업이 요원하면 경영대학원에서 2년 정도 공부하며 이 곳에서의 학위를 따고 다시 취업에 도전할 생각도 했다. 독일어가 뒷받침된다면 그게 가장 괜찮은 선택지인 것 같았고.


난 보험분야가 좋고 은행쪽에도 관심이 많다. 특히 이곳 유럽에서 여러나라의 경제정책과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말로 하는 일 말고 순수하게 전문지식을 쌓아 일정시간이 지나면 Professional이 될 수 있는 약학, 의학쪽에도 관심이 간다. 한국에서 늘 직업 안정성에 회의감을 느꼈던 이유는 내가 하는 일이 누구나 단기간에 가르쳐주면 할 수 있는 대체가능한 일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오랜시간 일하며 터득한 감이나 안목은 가르칠 수 없는 것이지만, 단순히 테크니컬한 시각으로 봤을 때 직장인이 하는 일이 외부인이 와서 한다고 해서 진입불가능할 만큼 엄청나게 대단한 전문가의 영역인가에 대해서는 늘 물음표였다. 상부의 지시를 그대로 따라야하는 조직의 생리상 내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폭도 좁은 게 사실이고.


어떤 일을 하든 완전한 자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내가 연구하고 탐구하며 실제에 적용해봄으로서 느끼는 뿌듯한 기분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직업을 찾고 싶다. 예전처럼 당장 주어지는 일을 열심히 하는게 아니라,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하나의 요소로서 직업을 선택하고 싶다. 일이 내 정체성의 전부일 경우 삶이 심히 피폐해지는 것을 경험했으니.


어느 쪽이든 독일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드니 일단은 급하게 생각지 말고 언어에 집중해야겠지만, 내가 이 곳 독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행복할지를 기준으로 직업도 골라야겠다.

나란 사람은 누군가의 딸이자, 언니이자, 아내이자, 학생이기도 한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가운데 꼭 직업이 없어도 되겠지. 하지만 '일' 혹은 '공부'를 하며 스스로 느끼는 앎의 기쁨과 몰입의 행복은 누군가가 줄 수 있는게 아니고 내 스스로 얻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니,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할지'라는 중요하고도 즐거운 고민을 오늘부터는 좀더 진지하게 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