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가 알고있는 피카소 작품과 다른 평범한 일상이나 인물화, 풍경화들이 많아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큐비즘을 향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뎃셍과 초기작품들이 많아 흥미롭다.
특히 이 미술관에는 나를 엄청 웃게한 전시테마가 있었는데, 바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보고 피카소가 영감을 얻어 그린 수십점의 작품을 모아둔 방이다.
난 사실 미술관에 큰 취미가 없었다.
고3때 수능이 끝나고 더이상 시험을 위한 공부를 할 필요가 없어 모두가 풀어져있던 시간, 미술 선생님께서 다양한 그림을 읽어주는 수업을 하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미술이 어려운 예술이 아닌 재미있는 책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림도 결국은 시대상이나 인간의 감정 등을 표현하는 하나의 장르구나...라는 걸 깨닫게 해준 시간.
이후로 그림을 보는 것에 거부감이 없어졌고, 직장인이 된 후엔 빡센 업무 후 퇴근하는 길 나를 위로하는 방법의 하나로 저녁에도 여는 전시를 찾아 덕수궁, 대림미술관, 예술의 전당 등을 찾는 일이 잦아졌다.
그렇게 샤갈, 아르누보, 인상파, 기획전시 등 다양한 작품들을 내 식대로 보고 느끼곤 했다.
독일에 와서는 유럽의 다양한 미술관들을 찾아 내 식대로 보고 느끼는 시간이 힐링타임이 되었다. 언어 때문에 힘들던 시간이니만큼, 언어가 없어도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 걸려있는 미술관이 나에게는 더없이 편안한 공간이었다. 조용한 공간에서 그림을 마주한 그 순간에는 내 머릿속의 생각이 무한대로 확장될 수 있었다.
독일어라는 한계 속에 갖힌 채 나를 표현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온 우주 속을 떠다닐 수 있었기에 자유로웠다. 독일에 온 후 책을 더 많이 읽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곳에서 전혀 정보 없이 찾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뮤지엄에서 그가 재해석해 그린 <시녀들>을 만났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벨라스케스의 <시녀들> 원작이 있다고 한다. 나는 직접 본 적이 없으나 이 그림을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라는 책의 표지에서 처음 접했다. 그림이 주는 느낌이 굉장히 묘해서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이 작품을 피카소가 재해석해 그린 줄은 몰랐었다.
방 안으로 들어서기 전 외부에 원작과 피카소의 그림을 함께 요약하여 보여주는 코너가 있었는데, 이미 이 순간부터 흥미가 증폭되기 시작.
큰 전시실로 들어서 수많은 피카소의 <시녀들>을 보자 그 예술적 가치나 의미와 관계없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냥 나에게는 이 전시가 너무 재미있었다.
궁중화가였다는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어린 아이가 다시 그린 듯한 작품이 거대한 전시실에 쭉 걸려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인물 한명 한명마다의 특징을 잡아 재해석해 그린 것이 너무 신선했다.
우측 하단의 난쟁이 시녀의 모습을 정말 너무...못생기게 그린 그림들을 보고 신랑은
"피카소 너무 나빠...." 라고 하는데 거기서 또 빵터짐....
피카소의 <시녀들>
나중에 마드리드에 갈 기회가 있다면 원작을 직접 보고 싶다.
뜻하지 않게 즐거운 전시를 관람하고 떠난 바르셀로나는 나에겐 말라가나 마요르카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진 못했다. 가우디의 건축물을 비롯 곳곳에 멋진 건물들과 널찍한 거리, 예쁜 가게들이 많지만 여느 대도시에나 있을법한 정도의 즐거움만 누린 것 같아 특별함을 느끼진 못했다.
주변에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너무나 아름다운 도시, 또다시 방문하고싶은 도시라고 하는데 나에겐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이 더 매력적이었다.
언젠가 스페인을 다시 방문한다면 안달루시아 지방을 쭉 돌아보고싶다. 여러지역의 색채가 강렬한 햇빛 속에 잘 버무려진듯한 이곳의 색감과 분위기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버킷리스트였던 바르셀로나를 방문해본 것은 의미있었다.
이번 여행 전에 바르셀로나 관련 도서를 2권 읽고 갔는데, 어떨 땐 오히려 살짝 모르고 그냥 보는 것이 더 재미있을 때도 있는 것 같다. 이번엔 너무 많이 보고 알아서 직접 봤을 때의 감흥이 반감됐다고나 할까.
12월, 춥고 비내리는 독일을 떠나 15~17도의 햇살 가득한 지역에서의 4일을 마지막으로 2019년의 여행이 끝났다. 이제 보름쯤 남은 올해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 마켓의 글뤼바인과 함께해야지.
동네 집들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고, 새로 나온 앨범들에 겨울분위기 나는 신곡도 가득한 따뜻한 연말 잘 보내고, 고등학교때 이후로 세운 적 없던 2020년 새해 계획도 이번에 한번 세워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