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낭 대문과 두루치기의 마음
녹차밭을 산책한 뒤에는 가까운 관광지인 성읍마을로 향했다. 표선면 성읍리의 제주 성읍마을, 그 첫인상은 호기심이었다.
‘왜 이곳만 이렇게 초가집이 많을까?’
‘대체 어떤 연유로 이전 시대의 모습을 사진처럼 간직하고 있는 걸까?'
‘왜 더 편리한 집으로 바뀌지 않고, 개발되지 않고, 역사와 발전의 흐름 속에 변화하지 않고, 제주의 초가와 제주의 대문과 제주의 돌담을 간직하고 있는 거지?’
전통 방식의 초가집과 돌담들로 이루어진 거리는 더 조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예스러웠다.
그래서 찾아봤다. 성읍마을은 조선시대 제주도 행정구역인 ‘정의현’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원래 정의현은 성산읍 고성리에 있었는데, 외적의 침입이 잦고 식수를 구하기 어려워 1423년에 지금의 성읍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후 약 500년간 중심지로 번성하다가 1984년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된다.
이런 배경에 더해, 관광지가 적극적으로 개발되던 해안가와 달리 내륙 깊숙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근대화의 물결을 피해 이전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는 모양이다.
현재 성읍마을은 문화재 보호 구역으로 현대식 건물을 지을 수 없게 규제되고 있다.
전주 한옥마을과 비슷하지만, 그보다 훨씬 덜 관광지화된 느낌이다.
3월 평일이라 그런지 관광객은 거의 없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문을 연 가게도 많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진짜 옛 제주도를 걷는 느낌이었다.
성읍마을은 제주도 전통가옥의 구조가 잘 보존되어 있다. 특히 볏짚이 아닌 억새로 덮은 지붕이 특이하다. 바람이 많고 기후가 습해 물을 튕겨내는 성질이 있는 억새를 볏짚 대신 사용했다고 한다. 제주도 방언으로는 '새'라고 한다.
운 좋게도 산책 중 지붕을 교체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지붕 위에서 무거운 억새를 덮는 과정을 ‘새이음’이라고 한다는데, 나 말고도 여러 사람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하고 있었다.
성읍마을은 건물의 현대식 개조가 제한되는 대신 지붕 교체 비용을 지자체에서 지원한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실제로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이다.
마을의 집들은 현무암 돌담으로 구분되어 있고 대문인 ‘정낭’을 통해 구불구불한 ‘올레’로 연결된다.
제주도식 대문은 워낙 유명해서 제주도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양쪽의 구멍 뚫린 돌(정주석)과 가로로 끼워 넣는 나무 막대 세 개(정낭)로 이루어져 있다.
막대의 개수에 따라 집주인의 부재 여부를 알 수 있다. 0개는 집에 있음, 1개는 잠시 외출, 2개는 먼 곳으로 외출, 3개가 모두 걸려 있으면 오랫동안 집을 비운다는 의미다.
한편 올레는 큰길에서 집 대문까지 이어지는 골목을 말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도보여행 코스로 유명한 올레길도 이 올레에서 따왔다. 집집마다 정낭에서 올레로, 올레에서 큰길로 서로 연결된다.
이 멋들어진 집들 중에는 체험공방, 민박집, 식당도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사는 거주용 주택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성읍마을에 살아온 사람들일까? 외지인이라면 어떤 이유로 이곳에 남게 됐을까? 이래저래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최근 본 풍경 중 가장 예스러워서 당황한 탓이다.
성읍마을엔 집과 돌담 외에도 볼거리가 많다. 그중 하나로 꽃이 있다.
곳곳에서 붉은 동백과 샛노란 유채를 쉽게 만날 수 있다. 비교적 덜 알려져서 그런지 유명한 꽃밭보다 사람도 훨씬 적다. 배경에 현대식 건물이 없고 돌담, 초가, 나무뿐이라 고즈넉한 사진을 찍기에 제격이다.
성읍마을에서의 인상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문화나 건축 애호가, 그리고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싶은 제주도 여행지 1순위라고 할 수 있다.
굳이 바다를 건너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 특히 휴양지가 아닌 지역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색다른 문화를 보고 싶어서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할 정도로 세련된 현대식 카페보다는 과거를 간직한 초가마을이야말로 그 목적에 가장 부합하지 않을까.
차분하고, 조용하고, 예스러우며, 충분히 아름답다. 과소평가된 곳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큰 장점이 있다. 바로 흑돼지 두루치기를 혼밥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혼자 다니다 보니 어딜 가도 매번 식사가 고민이었다. 일단 가서 “1인분 되나요…?” 하고 소심하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특발성 전화공포증이 만연한 MZ세대인 내게는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은 위험이었다. 그래서 인터넷에 1인 식사 후기가 있는 곳을 주로 찾아갔다.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 방문한 식당들은 모두 혼자 온 여행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 그중 처음으로 1인 식사에 대한 차별 없는 환대를 경험한 곳이 바로 성읍마을의 두루치기 집이었다.
후기를 보고 찾아간 식당은 밖에서 보기엔 그리 친절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서 “혹시 1인분도 되나요?” 하고 소심하게 물어보니 “그럼요”, 하며 흔쾌히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긴장이 풀렸다.
두루치기 1인분을 주문하고 기다리니 곧 반찬과 쌈채소가 인심 좋게 나왔다.
'요새 야채값도 비쌀 텐데.'
식당 쪽에서는 환영해 줬는데 오히려 내 쪽에서 혼자 왔다는 사실에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래도 1인 손님은 번거롭고 마진도 적을 테니까.
곧이어 두루치기가 나오고 먹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주셨다. 달달 매콤한 양념과 기름기 적당한 돼지고기가 잘 어울렸다. 흑돼지를 혼자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는데 맛까지 좋았다.
덕분에 여행의 초반부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식사는 장소에 대한 기억까지 더 좋게 만드는 법이다.
흔쾌히 내어주신 1인분의 식사는 앞으로의 여정이 잘 풀리리라는 다정한 환대로 다가왔다. 막대를 모두 내린 정낭처럼. 들어와도 좋다고, 제주도가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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