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새벽 일출을 보다
이어지는 이야기로, 렌터카를 무사히 인수하고 성산에서 체크인을 했다.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제주 여행의 첫 행선지는 성산일출봉이었다. 그렇지만 아침 일찍 일출을 보러 갈 생각까지는 없었다. 그저 일어나는 대로 올라갔다 와야지,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계기로 새벽 일출을 보게 되었다.
숙소에 도착해 뒹굴거리며 성산 맛집을 검색하던 중이었다. 어딜 갈까 고민하다 보니, 동네 식당들이 대부분 아침 7시면 문을 연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오전 6시에 여는 가게도 있었다. 왜 이렇게 일찍 열까 생각하다가, 성산일출봉 입장시간이 오전 5시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다시 음식점을 둘러보던 중 작은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성산 '일출' 봉이구나.
일출 명소라 새벽부터 사람들이 성산일출봉을 찾고, 그 손님들을 위해 식당들도 일찍부터 문을 여는 거였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몇 분이나 걸리다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나도 일출을 보고 싶어 졌다. 기왕이면 누구보다 빠르게 나올 수 있는, 성산일출봉 코앞 숙소를 잡았는데 일출을 보지 않는 건 손해처럼 느껴졌다. 정상에 올라 새벽 일출을 보고, 내려와 봉우리 아래에서 보말칼국수를 먹으면 더없이 완벽한 하루의 시작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아침 6시 알림을 맞춰놓고 잤다.
다음 날, 정말로 아침 6시 10분쯤 눈을 떴다. 잠이 오지 않아 새벽 1시에야 잠들었고, 결국 5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몸은 무겁고 피곤했다. 이불속에서 극심한 고민이 일었다.
'이걸 가, 말아? 그냥 다시 잘까. 하지만 기껏 일어났는데….'
비몽사몽한 상태로 스스로와의 대화를 겨우 끝내고, 일단 나가보기로 했다. 선크림만 바르고 모자를 눌러쓴 채 숙소를 나섰다. 아직 어둑한 시간이었지만 길에는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다들 부지런하다고 속으로 감탄하며 모퉁이를 도는 순간, 정면에 성산일출봉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젯밤, 물을 사러 잠시 나왔을 때는 그저 까만 하늘, 혹은 비어 있는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던 방향이었다. 그곳이 바로 성산일출봉이었다니. 마치 등잔 밑이 어두운 기분이었다.
아침 6시 30분, 성산일출봉 입구의 카페들은 막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차장은 한적했지만 완전히 비어 있지는 않았다. 나도 이 부지런한 흐름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었다. 입장료를 결제하고, 유료 탐방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았다. 중간쯤 오르니 어느새 하늘이 밝아져 이미 해가 다 떠버린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일출을 놓치는 건 아닐까 걱정됐지만, 일단 끝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체력에는 자신이 없다. 운동도 나름 노력은 하지만 잘하는 편은 아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 마라톤을 뛰는 70대의 하루키를 떠올린다. 『용천염천』에서 그는 ‘체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분명하게 적었다. 부럽다.
성산일출봉은 이전에도 올라본 적이 있다. 사실 그때의 인상이 너무 좋아, 제주도를 다시 오기로 결심한 것도 있었다. 성산일출봉을 위해 성산에만 3박 4일을 잡은 것도 그 때문이다.
오르는 길은 상쾌할 정도로 적당히 힘들었고, 내려오는 길의 풍경은 탁 트여 있어 근사했다. 하산길 옆 검은 돌벽에 치는 파란 파도는 강렬한 바다의 힘을 느끼게 해서, 그것이 좋아 한국에 계속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그 기억을 가지고 다시 찾았다.
그런데 이전에 왔을 때는 전혀 힘들지 않았던 길이, 몇 년 더 낡아졌을 뿐인 몸에게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절반도 오르지 않았는데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체력 부족을 실감한다. 운동을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포기하고 내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분명 금방이었을 텐데. 기억을 되뇌며 계단을 멈추지 않고 올라간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몇 m 남았는지 알려주는 팻말이 두 번 정도 보인다. 이런 이정표가 걸음을 계속하는 데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팻말을 세운 사람들은 알고 있었을까. 힘이 풀릴 듯한 다리를 이끌고 정상에 다다른다. 정상까지 거리는 짧지만, 쉽게 느껴지진 않는다.
아침 6시 30분에 오르기 시작해 정상에는 50분쯤 도착했다. 성산일출봉 정상 전망대에는 나무 데크가 빙 둘러져 있고, 많은 사람들이 데크 계단에 빼곡히 앉아 있다. 올라오는 길 중반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아 한산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대부분 먼저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던 것이었다. 일출을 기다리기 위해서.
이쯤 되니 하늘이 더 밝아져, 혹시 이미 일출이 끝난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는데 설마 아닐 거라 생각하며,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르기 전 인터넷에서 확인한 일출 시간은 6시 48분이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웅성댄다.
"이미 끝난 거 아냐?" "아냐, 7시까지만 기다려보자."
그러다 누군가가 "와—" 하고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일출이 시작됐다.
고개를 드니 저 멀리 희미한 주황빛의 원이 살그머니 올라오고 있었다. 성산일출봉의 테두리 옆으로 다홍색이 스며든다. 붉게, 노랗게, 파랗게 빛난다. 빛은 강하지 않다. 그러나 분명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일출은 아주 조용하게 진행된다. 그렇다고 느리지는 않다.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동그라미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이라이트는 금세 지나간다. 곧 매일 마주하는 평범한 오전의 해로 바뀌어 제주도의 하늘을 밝힌다.
성산일출봉에서의 일출은 아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구름이 많아 색이 가려진 탓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뜻깊은 사건, 하나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게으른 내가 새벽 6시에 일어났다는 사실도 작은 성취였다. 아침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간다는 건 결코 일상적인 일이 아니다.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행’이라는 비일상에 하나의 기념 스탬프를 찍은 셈이었다.
올라오길 잘했다. 가슴 한켠이 뻐근해지는 뿌듯함을 느낀다.
챙겨 온 페트병 녹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조금 더 앉아서 하늘을 구경한다. 어느새 완연한 아침의 밝기로 변한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10분쯤 더 앉아 있다 일어나 정상 팻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길로 향한다. 성산일출봉 정상에는 정상석 대신 팻말이 세워져 있고, 고도 137m라고 적혀 있다. 이 정도가 내게 딱 맞는 높이구나, 생각한다.
내려오는 길은 성산 지대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절경이다. 가파른 계단 아래로 성산항과 우도, 다리 너머 저 멀리 고성리까지 보인다. 하늘이 조금만 더 파랬다면 더욱 아름다웠을 풍경이다. 3박 4일 간 앞으로 두 번은 더 오르게 될 산이니, 다음을 기약하고 내려간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도 아이스크림과 커피 한 잔을 산다. 몸국이나 칼국수를 먹을 생각은 하산길에 어디선가 폐기되었다. 달달한 아이스크림이 유난히 당겼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등산을 한 결과인지 몸이 당을 갈구하고 있었다.
코앞에 우도가 있는데 그 밖에서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당장 달콤하고 고소한 아이스크림이 줄 쾌감이 간절했다.
방에 들어와 드디어 ‘계획했던’ 아침식사를 즐긴다. 육지에서부터 가져온 프랑스식 시골 빵, 땅콩버터와 딸기잼, 그리고 커피와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을 테이블 위에 펼쳐놓는다. 호화롭기 그지없다. 핸드폰으로 재즈 음악을 튼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 그 무거운 잼을 지고 온 거야. 후회는 없다. 숙소가 성산일출봉 주차장에서 5분 거리밖에 되지 않아 아이스크림도 거의 녹지 않은 채다. 만족스럽다.
내가 그리던 장면을 현실에 구현해 내는 것, 그것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그게 숙소에서 혼자 먹는 셀프 조식이라도.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성산일출봉은 뭐랄까, 시각적으로 압도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풍광보다는 마음속의 뿌듯함이 더 인상적인 등산이었다.
내게 성산일출봉은 갖가지 애로사항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살고 싶게 만들었던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을 다시 찾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언젠가 다시 삶에 염증을 느끼고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 진다면, 나는 또 성산을 찾게 될 것이다.
성산일출봉은 약 5천 년 전 화산 분출로 터져 나온 용암이 굳어져 만들어진 응회구 지형이라고 한다. 제주도에는 이처럼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지형이 많다. 그중에서도 성산일출봉은 제주도 동쪽 끝에서 단단한 존재감으로 대표 관광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높이, 그리고 ‘일출봉’이라는 상징성. 성산 지역에서는 우도와 함께 가장 잘 알려진 장소다. 막상 올라가 보면 기대만큼의 감흥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올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새벽 일찍 제주도의 동쪽 끝에서 일출을 보았다는 사실에서 오는 자부심과 함께, 스스로의 체력에 대한 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처럼 한국에 대한 애정이 상승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산일출봉 정상에 서면, 복잡한 설명 없이 그저 이 문장이 떠오를 것이다.
아, 참 좋구나.
제주도 여행기는 계속됩니다. 구독해 두시면 다음 이야기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