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치기 해변과 녹차 족욕

여행은 종종 엉망인 순간 덕에 빛난다

by 김유연

제주도에 오기 전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었다. 녹차밭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초록빛이 답답한 속을 펑 뚫어줄 것만 같았다. 사전 조사를 해 보니 녹차밭을 보며 녹차를 마실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바로 동쪽의 '오늘은 녹차한잔', 남쪽의 '수망다원'과 '제주다원', 그리고 서쪽의 '오설록 티뮤지엄'. 그 외에도 숨겨진 명소가 많겠지만 내가 찾은 건 이 정도였다. 이번 여행의 동선을 녹차밭을 중심으로 짤 정도로 메인 콘텐츠 중 하나였다.


여행의 출발점이 동쪽의 성산이었기에 동쪽, 남쪽, 서쪽의 순서로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녹차에 꽂혔나? 하면,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커피를 완전히 끊었다. 친구를 만날 때나 장소가 필요할 때 카페를 가긴 하지만, 더 이상 커피가 주는 에너지나 각성 효과를 위해 마시지는 않는다. 가능하면 디카페인을 선택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차를 자주 찾게 됐고 녹차와도 가까워졌다. 녹차에도 카페인이 있지만 커피보다는 양이 적고 체감도 한결 부드럽다. 테아닌 성분 덕분에 긴장을 완화하는 효과도 있어, 각성의 방식 자체가 커피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그렇게 녹차와 친해지던 중 한국의 대표 차 산지 중 하나인 제주도에 오게 되었으니 제주 녹차를 마셔봐야 하지 않겠냐는 결론에 이르렀다.




성산일출봉에서 내려온 후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오늘은 녹차한잔'에 방문해 이름처럼 녹차 한 잔을 마시고, 섭지코지에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매번 예상치 못할 순간이 이어진다.


성산일출봉에서 어떤 부부가 광치기 해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지도를 보니 마침 가는 길이어서 들러보기로 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둘러보니 생각지도 못한 넓은 유채꽃밭이 펼쳐졌다. 알고 보니 광치기해안 주차장 옆 유채꽃밭이 사진 잘 나오기로 유명한 포토 스팟이었다.


유채는 4월에 핀다고만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만개한 풍경을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신이 나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잔뜩 찍었다. 관광객끼리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다.


0E51A25C-6719-4DDF-9B87-82CAA6324E5F_1_201_a.heic 만개한 유채꽃밭.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유채꽃밭은 계획에 없던 노란 축제였다. 시선을 사로잡는 샛노란 색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그 화려한 노랑색에 홀려…, 예상치 못한 불운을 만나고 만다.


사진을 다 찍고 광치기 해변으로 이동했을 때 벌어진 일이었다. 제주도에 와서 처음으로 마주한 해변가였기에 가능한 물 가까기에 가고 싶었다. 분명 물이 들어오지 않는 안전지대까지만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땅이 젖어있긴 했지만, 일곱 번의 물길을 관찰한 결과 이 구역까지는 닿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그 '바다에 가장 가깝지만 물이 들어오지는 않는' 안전 구역에서 바다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려 앉자마자, 여태 없던 강력한 파도가 들이닥쳤다. 일곱 번 괜찮았는데 여덟 번째에 꽝일 수가 있는 건지. 들이친 물살이 신발을 푹 적시고 말았다.


깜짝 놀라 물러섰지만 이미 양말도 운동화도 흠뻑 젖은 채였다. 완전히 계획 밖의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더럽고 축축한 신발을 끌고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이제 원래 목적지였던 녹차밭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조금 풀이 죽은 채로 운전을 해 녹차밭 카페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직원 분께서 족욕을 하러 왔냐고 물어봤다. 1층이 족욕 공간, 2층이 카페로 되어 있었다. 카페에서 녹차를 마시려면 반드시 족욕 공간을 지나야 하는 구조였다.


성산을 나설 때만 해도 족욕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원래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았고, 몇 번이고 해 봤고, 심지어 예전에 제주도에서도 해 봤다. 이번엔 정말이지 족욕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수영장을 들르는 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건조하고 싶었다. 일정 중 물에 젖는 건 불편하고, 족욕은 입욕제 판매로 이어지는 시끄러운 관광상품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직원이 족욕을 언급하는 그 순간, 바닷물에 젖어 축축하고 찝찝해진 발의 감각이 뇌를 쿡 하고 찔렀다. 생각지도 않았던 족욕이라는 행위가 갑자기, 지금 당장 반드시 해야 할 "제주도 관광 필수 코스"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바로 결정할 필요도 없었다. 족욕 프로그램이 정각마다 진행해서 다음 타임까지 50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신호였다. 나는 즉시 결제를 유도하는 방식의 이벤트를 매우 싫어한다.


그래서 2층으로 올라가 따듯한 녹차를 주문하고, 결정을 유예받은 50분 동안 원래의 일정—녹차밭을 보며 녹차를 마시고 글을 쓰기—을 완수했다. 그 와중에 끝내 족욕을 해 보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음료를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오니 10명 정도의 단체 여행객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입장하니 다른 패키지 여행객들도 합류해 총 30명 정도가 함께 진행하게 되었다. 혼자 온 사람은 나 하나였다. 혼자 왔다고 하니 맨 앞의 전망 좋은 창가자리로 안내해 주셨다. 일등석을 배정받아 괜스레 고마운 마음으로 족욕을 시작했다.


유기농 녹차로 만든 입욕제와 바디솔트, 그리고 녹차 오일로 이어지는 3단계 코스였다.


뜨끈한 물에 맨발을 담그고 녹차가루를 풀자 녹차에서 나온 기름이 매끈하게 피부를 감쌌다. 차 향을 맡으며 발을 만지르는 기분이 꽤 좋았다. 바디솔트로 뒤꿈치를 문지를 땐 건조한 발목이 따끔거렸지만 이내 부드러운 오일로 마무리하니 촉촉하고 따뜻했다.


그냥 물도 아니고 녹찻물에 발을 씻은 데다가 오일로 보습까지 한, '잘 마른 발'을 갖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대 성공이었다.


E2940B6E-EFCE-4BCD-A985-7C7EE5119391_1_102_o.jpeg 바닷물에 젖은 발을 녹차물로 씻다


광치기 해변에서 물에 젖지 않았다면 족욕을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또 애초에 성산일출봉을 새벽에 오르지 않았더라면 그 부부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테고, 광치기 해변에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의 선택이 수많은 연쇄작용을 만들어낸다.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도 여행의 묘미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인생도 그렇다.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이래도 계속 계획을 짜?'라고 말하는 것처럼, 너무하도록 나쁜 일만 연속적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울고 싶고, 소리 지르고 싶고, 이건 억지라고 따지고 싶다. 그러나 그게 삶의 흐름이라면 어쩔 수가 없다. 구명조끼도 없이 던져진 삶에서 어찌 힘으로 물살을 거스르겠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그 결과로 맞이한 예상 밖의 행운에 시선을 돌리는 게 낫다. 축 젖은 신발에 집중하는 대신 녹차 족욕을 경험해 봤음에, 미뤄진 졸업 대신 뜻하지 않게 주어진 시간으로 제주도를 여행함에 감사하는 게 낫다.


감사가 거창한 단어라면, 즐긴다는 표현으로 바꿔 본다. 계획을 벗어난 사건은 새로운 변화를 동반하고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선택지를 눈앞에 들이민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려하지조차 못했던 새로운 즐거움을 만나게 된다.


그런 우연성 또한 삶의 모습이다. 결코 나쁜 것만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쁜 것만 보기로 결심한다면 모두 소용이 없다. 아무리 세상이 새로운 즐거움을 보여주려고 해도 지독하고 끈질기게 피해내고 말 것이다.


불행에 구태여 시선을 고정하고, 불운에 압도당해 갇혀있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감옥 같은 굴 속에도 빛 비추는 하늘이 있고 굴의 끝도 존재한다는 걸 믿는다면, 세상은 당신에게 파란 하늘을 보여줄 것이다.


광치기 해변과 녹차 족욕에서, 거창한 삶의 의미를 이끌어내 본다.


5FE80CD3-2B0C-4038-9FC6-7A060DED8FDF_1_201_a.heic 햇볕이 내리쬐는 제주도의 녹차밭. 족욕 덕에 잘 마른 발로 기분 좋게 산책했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5화아침 7시 성산일출봉 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