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연 Apr 08. 2021

이민을 꿈꾸는 이유

대한민국 출생 한국 부적응자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계획이 없으면 불안하다. 앞길에 대한 로드맵과 이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으로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방식이 내게는 더 어울린다. 


그렇기에 당장 5년 앞의 미래만 불확실해도 초조하고 불안하다고 느낀다. 확실히 정해졌으면 한다. 내가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설령 나중에 변한다고 해도.


미리 계획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일도 있다. 이민이 그렇다. 단순히 지금의 삶이 싫어서 도피하고 싶다던가, 막연히 언젠가 어디에서 살아보고 싶다던가 하는 애매모호한 마음으로는 의사로서 이민 갈 수 없다. 안 그래도 어려운 의학을 현지어로 공부하고, 시험 보고, 또 진료까지 시행해야 한다. 타국에서의 외로움을 견디며.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서.


한국에서 계속 사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나를 지지해주고 도와줄 사람이 잔뜩 있다. 함께 어떻게든 해낼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삶을 살아가겠지. 이쪽의 그림은 비교적 명확하게 그려진다. 그러나 이민은 도박이다. 지지해주는 사람 없이 먼 곳에서 홀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한다. 성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성공한다고 행복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한국에서 누릴 수 있게 될 것들과 소중한 인간관계 모두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민이 리스크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민을 되뇌게 되는 건 그만큼 현재의 삶이 결핍되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선 이 결핍을 채울 수 없으리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결핍의 정체는 자유다. 내가 나 자신으로써 온전히 존재할 자유. 사람을 그저 사람으로 대할 자유. 비굴해지지 않을 자유. 여유시간을 누릴 자유. 원하는 삶의 방식을 살아갈 자유. 아등바등 살지 않을 자유. 경쟁하지 않고 만족할 자유. 사랑할 자유. 나는 대한민국에서 자유를 찾을 수 없으리라 느낀다. 그리고 아름다움도. 여유도.


한국에서 사는 삶이 명확하게 그려진다고 했다. 그 삶은 행복한가. 아마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보통의 경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이다. 아득히 위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40대가 넘어서의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혼자겠지. 한국에서 더 위로 올라가려면 혼자여야 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한국에서 실현하려면 연애나 결혼, 심지어 육아는 상상할 수도 없다. 끊임없이 달려야 할 테니까. 오로지 부를 쫓아서. 내가 바라는 삶의 방식대로 살려면 부자여야 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리고 한국의 의사들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목표로 하고 한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직업 중 하나이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매일매일이 가쁘고 힘들어 보인다. 한국에서 의사로 살게 될 나 역시 비슷할 것이다. 바쁘게, 아등바등,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후회하며, 우울하고, 외롭게. 우울과 외로움은 날 때부터 새겨진 본질이라 어쩔 수 없다 쳐도. 생계에 대한 두려움과 경쟁에서 오는 압박감에는 대한민국 특유의 비릿함이 있다. 사실 의사뿐 아니라 모든 직업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또, 상하관계를 너무너무 싫어하는 내가 한국사회에 ‘정상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한국은 정상에 과하게 집착한다. 사람은 모두 개인으로서 고유하게 존재할 텐데. 정상적인 인간상을 정해 놓고 그것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 하면 눈초리를 주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인 이상 주위 사람의 눈치를 아예 보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게 사람이다. 아니, 우리만 그런가? 아무튼 이곳의 사람들은 자연스레 타인에게 비친 나를 쉬지 않고 의식하며 산다. 그리고 때로는 그러한 방식이 숨 막히게 답답하다.


한국에서 자유로워지는 것과 타국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어느 쪽이 더 쉬울까. 잘 모르겠다. 결국 사는 장소보다는 나 하기에 달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사는 환경이 곧 삶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나가봐야 알 것 같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떠나기 어려워질 테니 미리미리 계획해야 한다. 의사로서의 이민 기회는 한 번뿐이다.


이민을 꿈꾸는 데 꼭 부정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험해 보고 싶다. 이곳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내고 싶다. 내게 이 넓은 지구 어디에서든 살아갈 능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내가 살아온 동네가 전부가 아님을 보고 오고 싶다. 세상에는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고 거기에는 상하가 존재하지 않으며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내 신념을 확인하고 싶다. 삶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다.




그러나 크게 걸리는 문제가 둘 있다.


첫째로, 나는 평생 혼자 살 거라 생각했다. 당연하게 혼자인 미래를 그렸다. 스스로 혼자임을 잘 견디는 편이라고, 심지어 즐긴다고 여겼다. 타인과 함께 사는 삶은 상상도 못 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어디에 나가서 살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외국이라도. 그런데 연애를 해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함께인 시간은 충만하다. 함께일 때만큼은 본질적 외로움이 잠시나마 자리를 감춘다. 그 순간만큼은 얼마나 안정적이고 포근한지. 그러나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이 얼마나의 안정감을 주는지를 알아버렸으니 혼자의 외로움도 더욱 뼈저리리라. 그리고 이민을 가면 적어도 한동안은 철저하게 혼자일 것이다. 물론 새로운 장소에서 함께할 인연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없다. 나와 그 사람의 룰은 국가급으로 다를 테니까.


둘째는 가족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도움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흔쾌히 그 도움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대개 가족뿐이다. 부모님께서 나중에 나와 오빠를 의지하셔야 할 텐데. 나 역시 기꺼이 그러고 싶은데. 그게 당연한 도리라고 여기는데도. 이민을 가버리면 그럴 수가 없다. 부모님께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싶다. 적어도 배신감과 실망감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면, 떠나는 게 맞겠지. 내게 맞을지 맞지 않을지 미리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든 미리 시간을 내어 타국의 삶을 살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오늘도 반쯤 꿈꾸는 채로 일상을 살아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