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서귀포에서 느낀 익숙한 감정들

#1

by 복대동불나방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랜딩기어를 요란하게 땅에 두들기며 착륙한 기장의 서투름 때문은 아니었다. 돌아갈 때는 대한항공으로 바꾸자고 짐짓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리던 옆 좌석 아저씨의 한 시간을 넘는 투정은 그나마 견딜 만했다.


그건 매일 출근길에서 느꼈던 그 감정을 비행기에서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비행기가 서자마자 잽싸게 일어나 복도로 나서 짐을 꾸려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앉아있던 중년 부부와 과년한 딸로 보이는 세 명은 편안히 앉아 어수선한 복도가 한산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기다리는 줄 알았다. 눈 깜짝할 새에 딸을 앞세운 두 모녀는 굳이 내 앞을 얄밉게 끼어들며 급하게 내리려 하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마음을 다스리려는 찰나, 덩치 좋은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기내에 넣기엔 과하게 크고 무거워 보이는 캐리어를 방천화극을 휘두르는 여포마냥 휘휘 휘두르며 두 개나 내리고 있었다. 매일 아침 솔밭공원 사거리 근처에서 느끼던 무례함을 비행기 복도에서 재회하는 것은 정말 불쾌한 일이었다. 그래 봤자 몇 초 차이일 뿐인 것을. 모처럼 여유를 갖고 긴장을 풀러 온 이곳에서 시작부터 예민해질 필요는 없지 않겠냐고 스스로를 다스렸다.


마음을 추스르고 비행기를 나서 계단을 내려가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청주 시내나 제주 공항이나 거기서 거기겠지만 눈뿐만 아니라 콧속에도 제주를 담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었다. 갑자기 앳되어 보이는 공항 직원이 가녀린 팔을 뻗어 내 앞을 가로막는다. 밉살스러운 세 가족을 마지막으로 버스는 가득 찼으니 다음 버스를 타라는 제스처였다.


다시, 짜증이 치솟았다.


나이를 서른셋이나 먹었는데 아직도 버스는 설레고 무서웠다. 사실 잘못 타도, 잘못 내려도, 별 문제는 없다.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고 통장에는 전국을 택시로 수십 바퀴를 돌아도 끄떡없는 잔고도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렌트카가 아닌 버스를 처음으로 탄 나는, 합정역에 있던 연극동아리를 벌벌 떨며 혼자 다녔던 겁 많던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는 핸드폰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네이버 지도에서의 내 위치와, 내릴 정거장, 남은 정거장 개수를 계속 세고 있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를 추구하러 떠나 온 마당에 그깟 버스 정류장 따위에 전전긍긍해하는 나의 지질함이 질색스러웠지만,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내 모습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캐리어를 드르륵드르륵 끌며 호스트가 안내해 준 숙소로 발길을 이어나갔다. 버스에서 내리기 세 정거장 전에 숙소의 도어락 비밀번호를 문자메시지로 물어봤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좀 더 빨리 물어볼 걸 그랬나’하는 후회를 시작하려던 찰나, 눈앞에 풍광이 펼쳐졌다. 바닥이 어딘지 모를 짙고 푸른 바다가 탁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선 역한 짠내를 품고 매캐한 연기를 풀풀 뿜어대는 작은 고깃배들이 부두를 바삐 드나들고 있었다. 그제야 이걸 보기 위해 왔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긴장이 풀렸다.


주소를 보고 찾아온 집에는 세 동의 낡은 시멘트 건물이 있었다. 첫인상은 재개발이 임박한 용산 어귀의 낡은 판자촌에서 그나마 제 구실을 하는 집 같아 보였지만, 건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멍이 송송 뚫린 까만 돌들을 쌓아 세운 담벼락이 이 집에 특별함을 부여했다. 어느 방에 짐을 부려야 할지 몰라 갸우뚱거리고 있을 때,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완?”


예상치 못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호스트에게 방 두 개를 세 내어 준, 진짜 집주인이신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나는 꽁꽁 얼어버린다. 내 일을 함에 있어서 이는 나의 큰 약점이었고, 상대방이 파고드는 빈틈이기도 했다. 이를 고쳐보려 여유로운 척도, 때론 능글맞은 척도 해보는 나지만 낯선 여행지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떠듬떠듬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다. 나는 경계심이 많지만 할머니의 말에서는 경계해야 할 건덕지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할머니의 한 마디가 불쑥 파고들었다.


“밥은 먹언?”


한국 사람이라면 낯설지 않은 인사치레에 불과했지만 언이라는 글자가 날카로운 정이 되어 가슴을 파고들었다. 헤어진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께서 나를 볼 때면 늘 하셨던 그 말이었다. 미안할 정도로 그리워하지 않았는데, 덮고 지나갔던 과거의 한 페이지라고 생각했는데, 다정하게 묻는 저 두 마디가 아프게 파고들었고 아찔해졌다. 라면을 끓여주시겠다는 호의를 사람 좋은 얼굴로 애써 거절하고 방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할머니께서는 라면 대신 분명 두 봉지는 넣은 게 분명한 인스턴트커피를 구색을 갖춘 다기에 담아 내 손에 쥐어주셨고, 컵을 씻어 갖다 드렸더니 이번에는 한라봉 하나와 감귤 두 개를 건네셨다. 내가 게임 속의 캐릭터가 되어 연계되는 퀘스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는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며, 받은 과일들을 탁자에 올려두고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오는 길에 봐 두었던 텐동집에 갔다. 텐동집은 뷰가 매우 재밌었는데 내가 묵는 그 집이 위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뷰였기 때문이다. 가게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테라스에 앉아 내 숙소를 찍어보며 텐동을 먹었다. 산남동에서 먹었던 텐동만 못했지만 걸쭉한 노른자와 시치미, 그리고 간장을 밥에 비벼먹는 것은 만족스러웠다. 눅진한 기름 냄새가 나는 텐동집에서 책을 읽기는 그래서 가게 직원에게 경치 좋은 카페를 아시냐 여쭤보며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있는 카페였지만, 오히려 좋았다. 차로 다닐 땐 즐기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걸으며 느낄 수 있었다. 멋들어진 전원주택 마당에서 딸과 함께 잔디를 베는 아저씨를 보며, ‘저 사람을 뭘 해서 돈을 벌었을까?’하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고, 이름 모를 외국의 화초와 나무들을 보며 마치 해외에 나온듯한 기분도 느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아카시아 향기가 반가웠다. 이 향이 아카시아인 것을 아는 이유는 아카시아 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아카시아 향 껌을 즐겨 씹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참 무식한 도시 촌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카페에 다다랐고 텐동집 직원이 얘기했던 대로 정말 전망이 좋은 곳에 있었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위치에 넓게 뜰을 펼쳐둔 카페는 지붕에 잔디를 덮은 반구형의 둥근 건물이었다. 얼핏 보면 떼를 덮은 무덤 같은 자태였다. 카페 안에는 이국적인 잡동사니 몇 개와 야구 용품들, 그리고 하얀 슈가파우더와 과일을 얹어놓은 빵 따위가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카페의 입장권과 진배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후 앉을 곳을 둘러보았다. 1층은 오래된 수도원마냥 캄캄했고 뜨락은 휴가를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2층에 자리가 있길 바라며 헤이즐넛 시럽을 두 번 퐁퐁 누르고 계단을 올랐다.


다행히 2층은 밝았고, 자리도 꽤 있는 편이었다. 아쉬운 점은 의자가 너무 폭신해서 책을 읽기에는 다소 불편했다. 그리고 한 모금 들이킨 아메리카노는 내가 싫어하는 산미가 가득해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쨌든 의자에 앉아 그동안 읽고 싶었던 「새벽의 나나」를 펴 들었다.


다행히도 책은 기대에 부응했다. 먼 기억 속에 묻혀있던 방콕의 끈적하고 눅눅한 분위기가 글에서 묻어 나왔다. 수완나품 공항에 내리면 금세 축축해지는 옷에 당황하게 된다. 하지만 이내 방콕 시내에 들어올 때쯤이면, 태국에서는 샤워를 하고 난 직후가 아니고서야 절대 뽀송뽀송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처음 훈련소에서 각개전투를 받을 때는 전투복에 축축한 흙이 묻는 게 더러워서 싫지만, 30분쯤 지나면 전투복에 흙이 묻는 건 고사하고 흙이 입에 들어가지만 않아도 감사하게 되는 그 느낌과 비슷하다.


책은 도저히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묘사가 자세했다. 먼발치서 보았던 스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던 태국의 소녀들을 주렁주렁 달고 터미널21 따위에서 몇 푼 안 되는 연금을 박박 긁어 재력을 과시하던 쭈글쭈글한 노인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멀리서만 보며 상상했던 내용들이 소설 속에 펼쳐지자 상당히 역해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그러자 창 밖에서는 하얗게 이를 드러낸 파도가 쉴 새 없이 해변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책을 읽으며 행복한 망상 속에 빠져들곤 했는데, 오히려 암담한 책의 내용을 피해 고개를 돌리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이 꽤나 아이러니했다.


가만히 바다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파도는 왜 바다에서 해변 방향으로만 오는 걸까? 지구과학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기에 당최 알 수가 없었다. 땅이 뜨거우니까 땅 위의 공기가 위로 올라가고 빈자리를 메꾸면서 파도를 일으키는 건가? 하지만 이게 말이 되려면 밤에는 파도가 반대 방향이 되어야 하므로 기각이다.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커서 물어보기 전에 나무위키에서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누비는 바다에서는 남성성이 느껴졌고, 그런 바다를 받아내는 땅에서는 여성성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바다의 신은 포세이돈이고 땅의 신은 가이아이지 않았나?


카페 뒤뜰에 세워져 있던 시동 동상들을 보며, 참 근본 없다는 생각을 했는데 막상 바다를 보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올리고 있는 나를 보니 적절한 장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었다.


KakaoTalk_20221001_102405920_01.jpg
KakaoTalk_20221001_102405920_02.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