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드르르륵
호스트 형님이 뻑뻑한 미닫이 현관을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타인이 내는 소음 때문에 잠에서 깨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일 년을 넘게 혼자 살다 보니 예전 같았으면 싫었을 상황조차도 반갑게 느껴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15년 만에 나온 세상에서 처음 맞닥뜨린 아저씨를 붙잡고 킁킁대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도 같다. 자취방의 편안한 침대를 놔두고 삐걱거리는 불편한 철제 침대에서 잠을 잔 이유를 찾기 위해 슬리퍼를 신고 집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나갔다. 마당을 나서자마자 어제 보았던 그 바다가 제자리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톱스타의 스케줄을 관리하듯 정신없이 일정을 챙기던 일상에서 벗어나 맞이한 오늘 아침이 퍽 반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제는 가지 않았던 방파제에 올라서 천천히 바다 앞으로 걸어 나갔다.
어제 바다를 보자마자 방파제에 올라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위해 참고 미뤄두었다. 평소 밥을 먹을 때도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남겨두고 마지막에 먹는 괴팍한 습성이 바다를 즐기는 것에도 발동한 것이다. 방파제 위를 걷는 것은 생각보다는 어려웠다. 바람이 서있기 힘들 정도로 불어대었기 때문이다. 겁이 많은 성격이라 원래라면 호다닥 내려왔겠지만, 방파제 옆을 빼곡히 채운 테트라포드가 나의 객기에 힘을 보태었다. 마침내 방파제 끝에 앉아 바다를 보며 라이터를 당겼으나 바람 때문에 불을 붙이는 것은 한세월이 걸렸다. 아마 촬영이었다면 몇 번은 NG가 났을 그런 상황이었다. ‘터보라이터를 사야겠다.’ 따위의 생각을 할 무렵쯤 간신히 담배에 불을 붙였고,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려 했으나 세찬 바람이 머릿속에 생각을 담아둘 틈을 주지 않았다. 생각을 포기하고 담배를 비벼 끌 무렵 방파제 끝에 검지 크기만 한 새끼 물고기가 죽어 있는 게 보였다. 이 물고기는 잡힌 물고기였을까, 잡기 위한 물고기였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방파제를 내려와 다시 방에 들어가 누웠다.
다시 한번 잠에서 깼다. 휴가를 내서 온 여행 둘째 날이었으면 상상도 못 할 사치를 부렸다는 게 내심 뿌듯했다. 그리고 잠결에 본 바다가 진짜 바다였다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방문 앞에 어제 받았던 그 다기에 어제와 같은 양의 인스턴트커피가 담겨있었다. 아마 집주인 할머니께서 모닝커피를 권하시려다 게으른 육지 놈에게 혀를 내두르고 가신 거겠지. 커피를 쭉 들이켠 뒤, 할머니께 차마 빈 잔을 돌려드리기 민망해 주변 빵집을 찾아보았다. 동네 빵집의 롤 케이크 정도면 구색이 맞을 것 같은데 관광지라고 온갖 특색을 갖춘 빵집들만 있었다. 다행히도 소보로와 꽈배기를 파는 빵집이 있어 산책 겸 점심을 구할 겸 할머니께 드릴 빵을 살 겸 집을 나섰다.
“할머니 빵 좀 드시겠어요?”
깜빡하고 커피 잔을 들고 오지 않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현관에서 다섯 번 정도 망설이다가 간신히 소리를 내었다. 방에는 할머니의 딸과 손녀뻘쯤 되어 보이는 손님이 있었다. 빵을 네 개 밖에 사지 않았는데 거 육지 놈은 참 손도 작다는 생각이 드시면 어쩌나 걱정을 하던 찰나, 우악스럽게 놀라시며 고마워하시는 할머니 모습에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한 잔 더 타 주시겠다는 커피를 간신히 마다하고 방에 들어와 미뤄둔 숙제를 시작했다. 제주도에 일하러 왔다고 해놓고선, 방에 틀어박혀 잠을 자거나, 책을 읽거나, 자판을 두들겨대는 모습을 보면 등단하지 못한 삼류 작가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실소가 스며들었다.
얼추 숙제를 마치고 보니 출출해졌다. 어제 핸드폰으로 찾아보았던 고기국숫집은 1.6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니 슬슬 걷다 보면 배가 고파질 때쯤 도착할 터였다. 고기국숫집을 가는 길은 생각보다는 힘겨웠다. 이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전부 오르막이었다. 배부를 때는 내리막을 걸을 테니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고기국숫집에 들어갔다.
“몇 명이세요?”
“혼자예요.”
다행히도 식당은 붐비지 않아 눈치를 덜 보고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세트 메뉴가 쓰여 있어 고기국수에 수육을 더 먹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세트는 2인부터였다. 회사 면접을 망치고 여자 친구와 무작정 떠났던 여행 때 먹은, 비계가 아삭거리던 수육 맛이 떠올랐다. 다음에도 꼭 다시 오자던 지키기 쉬워 보였던 약속이 이제는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는 게 서글펐다. 다행히 이 집 고기국수의 수육 맛은 그때만큼 맛있지는 않아서 생각을 접어두고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안녕!”
어제 카페를 다녀오다 보았던 하얀 말이 담장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이 용케도 내가 백말띠인 걸 알아본 건지 다가와 줘서 반가웠다. 속눈썹이 어울리지 않게 길게 삐져나온 게 나랑 비슷해서 마음이 갔다. 손을 내밀어보니 눈을 마주치며 부드럽게 주둥이를 내밀어주었다. 눈을 마주치면 잠시 응시하다 이내 갈 길을 가버리는 도둑고양이 놈들보다는 훨씬 믿을만한 녀석이다. 무언가를 더 해보고 싶었는데 빈 손이 민망했고, 마침 어제 먹지 않고 남겨 둔 할머니께 받은 감귤이 떠올랐다.
“조금만 기다려.”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만 꼭 돌아오겠다는 신뢰감을 주는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감귤을 가지러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근데 말이 귤을 먹어도 되나?’ 말이라곤 어린이대공원에서나 봤을 서울 촌놈한테 그런 지식이 있을 리가 없었다. 네이버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주인 몰래 귤을 먹은 강아지 이야기뿐이었다. <구글은 모르는 게 없다.> 학부 때 경험을 살려 서툰 영어로 구글링을 해보니 먹어도 된다는 내용이 있어 기쁜 마음으로 감귤을 가져왔다. 나를 기다리다 지쳤는지, 기다리긴 했는지, 말은 저 멀리 뒤돌아서 풀을 뜯고 있었다. 불러보고 싶었지만 이름을 알지 못해 가만히 서서 기다렸다. 내가 두견새가 울 때까지 기다리겠다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나 하는 생각을 할 때쯤 하얀 말은 천천히 다가왔다. 새콤달콤한 귤을 맛보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말이 내 손을 꽉 깨물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 서로 다투었다. 오른손은 마우스를 쥐어야 하니 다쳐도 왼손을 다쳐야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간신히 귤을 건네었고 말은 손끝을 입에 넣었지만 부드럽고 능숙하게 귤만 집어 우적우적 씹었다. 귤을 씹는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맛있는 귤을 주었으니 이 정도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콧잔등을 쓸어보았더니 싫어하지 않아서 기분이 좋았다. 내일은 마트에 가서 귤을 좀 더 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