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고집을 부리고 싶은 날이 있다

#3

by 복대동불나방

배가 고팠다. 수면욕을 이긴 식욕이 깨운 아침이었다. 30대가 되고 나서 가장 큰 변화는 예전만큼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예전만큼 먹으면 탈이 나곤 했다.


10대 때는 밤을 새도 졸린 줄 몰랐지만 20대 때는 밤을 새우면 하루를 꼬박 잤고, 지금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10대에는 치킨 한 마리를 먹고도 라면을 보면 구미가 당겼고, 20대 때는 치킨 한 마리면 만족을 했다. 30대인 지금은 치킨을 시키면 비닐봉지로 반을 덜어 먼저 소분부터 해놓는다. 나이가 들수록 금전적인 여유는 늘어나는데 몸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으니 아쉽기 그지없다.


수업 시작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집 밖을 나가 골목 어귀를 도니 오늘따라 바다가 유난히 높아 보였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사러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끼어든 이름 모를 이국적인 나무와 새까만 돌담길과 우중충한 바다는 한걸음 한걸음을 기억 속에 남게 하는 특별함을 갖고 있었다.


지루했던 오전 수업이 끝났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 속의 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힘들어했다. 요즘은 ADHD라고 꽤 고상한 영어 단어로 이해해주는 분위기이지만,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때리거나 웃음거리로 만들거나, 어머니에게 이를 하지 않는 조건을 걸고 대가를 바라거나 했었다. 요즘 학교를 다녔으면, 비대면 수업 덕에 우유를 늦게 마신 다고 뺨을 맞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며 어제 봐 둔 빵집으로 향했다.


가게 앞의 수줍은 얼굴로 빵을 들고 서있는 돼지가 귀여워서 꼭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꿀핀이라는 돼지의 울음소리와 머핀을 합친 듯한 이름의 빵을 파는 곳이었다. 진짜 돼지는 앙증맞은 꿀꿀이 아닌 코를 먹는 듯한 컥컥에 가까운 소리를 내긴 하지만, 동화책을 읽어주는 아빠가 컥컥대며 돼지 흉내를 내면 아기도 아빠도 엄마도 잠을 잘 수 없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다.


빵과 커피를 받아 들고 가보지 않았던 길을 따라 내려갔다. 어떤 새로운 풍경이 있을지 기대하며, 촉촉한 빵을 한 입 물고 고소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걷는 것은 퍽 행복감을 가져다주었다. 가는 길에 마주쳤던 하얀 진돗개가 군침을 흘렸는데 빵을 보고 흘린 건지 나를 보고 흘린 건지 헷갈렸다. 길을 따라 내려가자 동그란 수영장을 둘러싼 무대가 보였다. 오사카의 유니버설 스튜디오에서 보았던 워터월드의 무대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해녀마켓이라는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이 보면 오해할 수도 있는 이름이 재밌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길게 갯바위가 바다를 향해 뻗어나가고 있었다. 끝에 다다르면 걸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시야에 수평선을 경계로 둔 바다와 하늘만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솟았다. 물이 꽤 들어와 있어 함정을 피하듯 요리조리 발을 옮겨 끝까지 걸어가니 생각했던 대로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오늘따라 유독 수평선이 높았다. 미어캣이 파도타기를 할 수 있을 정도 높이의 파도는 내 앞까지 몰려들다 바위에 부딪혀서 산산이 부서지고 또 몰려들다 부서지고를 반복했다. 날이 좋으면 꽤나 낭만적인 상상을 할 만한 곳이었지만, 그런 상상 속에 빠져있기엔 바람과 파도가 거셌다.


그렇게 서서 파도를 바라보던 중, 여러 겹의 파도 중에 어떤 파도가 내 바지를 적실만큼 높게 올지 재보고 있던 내가 징그러웠다. 세상에는 예측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이 많다. 그리고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회사에선 머리를 꽁꽁 싸매며 수많은 가능성들을 늘어놓고 계산했었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그저 지금을 즐기면 되고 바지가 젖으면 갈아입으면 된다. 그렇게 내려놓으러 온 곳이니까.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지갑과 가방을 챙겨 들고 집을 나왔다. 보름 동안 매 끼니를 사 먹을 순 없다. 마침 2km 거리에 이마트가 있어서 산책을 할 겸, 장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는 어제 갔던 고기국숫집에서 조금 더 가면 있었는데, 한 번 가본 길을 다시 가보는 거라 그런지 자신감이 붙었다. 가는 길이 지루해질 참이면 꽃향기가 났고, 또 지루해질 참이면 거인들이 먹을 법한 파인애플 모양의 나무가 보여 심심함을 달래주었다. 볼빨간사춘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다 보니 금세 마트 근처까지 왔다. 커다란 축구 경기장의 지붕과 그 지붕을 버텨주는 기둥도 보았는데, 회사 공장 마당에 있는 크레인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에 들어서자, 과일 코너가 제일 먼저 보였다. 어제 맛있게 귤을 먹던 말이 떠올라 귤을 좀 살까 하다 가격을 보고 마음을 접었다. 대신 당근이 제법 실해서 한 봉지를 집었다. 그리고 내가 먹을 오이도 한 봉지 집었다.

계획했던 만큼만 마트에서 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집까지 들고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계속 떠올렸지만 막상 계산을 하려고 보니 한 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오만 오천 원이 나와 신세계상품권을 쓰고도 딱 마트 쿠폰을 한 번 더 받을 만큼의 가격을 맞췄다는 점이었다. 복잡하게 계산을 하고 장본 것들을 담고 가방을 들어보니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트 앞을 나와 보니 족히 열 대는 돼 보이는 택시가 나를 유혹했다.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지체 없이 잘못을 인정하고 택시를 탔겠지만 혼자이기에 고집을 부려보고 싶었다. 손을 타고 올라와 팔을 타고 팽팽하게 느껴지는 무게가, 집에 돌아가는 길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예고했다.


‘헉’


어금니를 악 물고 걷던 와중에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언덕 아래로 펼쳐진 풍경이 무척 아름다웠다. 옹기종기 서 있는 슬레이트 지붕의 집들과 드문드문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 그리고 앞에 넓게 펼쳐진 바다와 흐릿한 경계를 타고 펼쳐진 하늘이 아름다웠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수평선이었다. 분명 마을은 아래로 펼쳐져있는데 수평선은 나와 눈높이가 맞았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며, 바다가 땅보다 높다는 네덜란드가 떠올랐다가, 네덜란드에 있는 어느 재수 없는 회사가 생각나서 이내 생각을 접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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