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김현우 옮김, 열화당, 104~111쪽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투기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세계 질서에서 미디어는 끊임없이 정보를 폭탄처럼 쏟아붓는다. 하지만 그 정보들은 대부분 계획적인 교란에 불과하며, 진실로부터, 본질적이고 다급한 것으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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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든 우파든 정치인들은 마치 현재 상황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듯 계속 논쟁하고, 투표하고, 해결책을 의결한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이 하는 담론은 공허하거나 보잘것없는 일들에 관한 것들뿐이다. 그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나 용어들─이를테면 테러리즘, 민주주의, 유연성 같은 말들─은 그 어떤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 전 세계의 대중들이 그 연설가를 따르는 것은 마치 아직 끝나지 않은 연설학교의 수업을 참관하는 것과 같다. 헛소리들.
지금 우리에게 폭탄처럼 퍼부어지는 정보의 또 다른 장은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화려하고, 충격적이고, 폭력적인 사건들이 차지하고 있다. 강도 사건, 지진, 전복된 배, 폭동, 대량 학살 같은 것들. 한 번 보여지고 나면, 하나의 구경거리는 다른 구경거리로 아무 맥락도 없이 그저 멍할 정도의 속도로, 대체될 뿐이다. 그 사건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 사건들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그것들은 삶의 위험요소를 보란 듯이 제시한다.
여기에 미디어가 세상을 전달하고 분류할 때 사용하는 언어가 더해진다. 그것은 전문 경영인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나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그 언어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본질, 혹은 질적인 면에 대해서는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비율을 이야기하고, 여론조사의 변동이나 실업률, 성장률, 증가하는 채무, 이산화탄소 측정치 등등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숫자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목소리지만 삶이나 고통받는 신체에 대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후회나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공식적으로 말해지는 것들, 그리고 그것들이 말해지는 방식이 시민들로 하여금 일종의 기억상실에 빠져들도록 부추긴다. 경험이 지워지고 있다. 과거와 미래라는 지평선도 희매히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불확실한 현재에만 살게 하려는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망각 상태의 시민으로 축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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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에 항의하고 저항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은 현재 명확하지 않거나 없다. 그 수단들을 개발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는 기다려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이런 망각의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야 할까.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물리학자들이 설명했듯이 시간은 선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인 것임을 기억하자. 우리의 삶은 하나의 선 위에 찍힌 점이 아니다. 이 선은 전례가 없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일시적 탐욕에 의해 절단되고 있다. 우리는 선 위의 점이 아니라, 원의 중심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원에는 석기시대 이후로 선조들이 우리들을 위해 남겨 둔 증언들이 있고, 꼭 우리를 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텍스트들이 있다. 자연과 우주의 텍스트. 그 텍스트들이 대칭적인 것과 혼란스러운 것이 공존할 수 있음을,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는 기발한 방법들이 있음을, 욕망의 대상이 언제나 약속의 대상보다 더 큰 확신을 주는 것임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 다음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과 우리가 목격한 것들을 보며 버텨 온 우리는 아직 상상할 수 없는 환경에 저항하고, 계속 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우리는 연대 안에서 기다리는 법을 배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그 모든 언어로 칭찬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일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