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94년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온 가족이 1999년 대전 유성구 전민동으로 이사 왔다. 유아기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이 동네에서 집만 이사를 다녔으니 나의 모든 게 이곳에 있다.
내가 살아온 이곳은 어떤 곳일까? 내가 오기 전까지 이곳엔 어떤 이야기들이 있었을까?
초등학교 교가에는 “동으로 계족산 우러러보면”이라는 가사가 있었다. 아침에 등교해서 교실 창밖을 바라보면 저 멀리 계족산에서 해가 떠올랐다. 전민동은 동과 서로 계족산과 화봉산–우성이산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는 갑천이 흐른다.
나는 산과 강, 하늘의 품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
전민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삼국시대부터라고 한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는 동안 편의시설로 정민역(貞民驛)이 있었다. 과거의 역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인의 여행을 돕고 공물을 운송하는 공공기관으로, 약 30리마다 설치되었다고 한다. 정민역에는 말 8필과 역리 31명이 상주했다.
현재 전민동에는 말 8필의 조각상이 정민역 유허비와 함께 옛 아리고개 터, 지금의 탑립동과 엑스포아파트 사잇길에 위치하고 있다. 얕은 산으로 둘러싸였던 이곳은 작은 방죽과 활 쏘는 사장터, 역벌(현재 엑스포아파트 자리)이 있었다고 한다. 역벌은 정민역의 역탑이 있던 곳으로 정민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바로 옆에 갑천이 흐르니 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기에 아주 좋은 땅이었을 것이다.
유성구 웹사이트의 유래에 따르면 역벌 마을에서 탑립동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마루처럼 이루어졌다 해서 ‘마루고개’로 불리다가 ‘다루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아리고개도 함께 불렸던 이름인 것 같다. 현재 이곳엔 ‘아리고개 식당’이라는 이름의 가게가 있어 각종 닭과 오리 요리를 판다.
‘정민’이라는 마을 이름은 ‘곧은 백성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었다. 1914년부터 ‘전민’으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주민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전민동의 오래된 교회를 다니고 있는 분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 목사님이 처음 전도사로 부임했을 때 이 마을은 온통 논밭뿐인 시골 촌구석이었다고 했다. 학교도 없어 한참을 걸어 다른 동네에 있는 학교를 갔어야 할 정도로 깡촌인 이곳에(열 가구 정도밖에 안 되었고, 학교도 초등학교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부임한 전도사 부부의 살림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고 한다. 주일날엔 헌금 대신 달걀 같은 것이 들어왔다고도 했다.
또 전민동에는 서포 김만중 선생 문학비와 김반, 김익겸의 묘가 있다. 김반의 아들이 김익겸, 김익겸의 아들이 김만중이다. 성균관 강독관이었던 김익겸은 1614년에 태어나 1637년에 죽었는데, 병자호란 때 강화산성에서 항전하다 끝내 청나라 군사들에게 함락되기 직전 분신 자결로 순국했다. 24세였다. 이때 김익겸을 비롯해 순절한 사람이 30명이 넘었다고 한다. 김익겸의 어머니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음독 자결했다. 김만중은 아버지의 사망 한 달 후 유복자로 태어난다.
비석과 석상, 넓은 동산 같은 묘역은 전민동 안쪽으로 숨겨져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수능 끝나고 미대 입시를 준비하던 고3 겨울밤에 마냥 걷다가 우연히 묘지가 가득한 언덕 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바로 거기였다. 전민동에서 높은 지대에 있었기 때문에 동네가 다 내려다보이고 하늘이 뻥 뚫려 있어서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구나” 하고 신기해했다. 여기서는 별도 더 잘 보였다.
한편, 생뚱맞게 왜 여기에 김만중과 그 일가의 묘역이 있나 싶었는데,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김씨 일가의 묘역으로 하사받은 땅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전민동에는 산소골 상여놀이가 전승되고 있다. 이 상여놀이는 숙종 때 인물인 노세신 장군의 장례식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988년 대덕연구단지가 조성되기 전 문지동(전민동/문지동/원촌동은 전민동이 포괄하는 하나의 법정동으로, 문지동은 전민동의 행정구역에 속한다) 지역은 예로부터 노씨 문중의 집성촌이었다. 지금은 전력연구원이 자리 잡고 있다. 화봉산을 오르다 보면 그들의 묘역이 동산처럼 펼쳐져 있다.
노세신 장군은 지금으로 치면 대대장쯤 되는 벼슬에 있었는데,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하며 탈상 때 제사상에 올릴 술을 빚었다고 한다. 시묘살이 끝무렵 한양에서 지체 높은 관리 한 명이 찾아와 그 술을 달라고 했는데, 노세신이 이를 거부했고 그는 끝내 다시 벼슬에 오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노세신을 비롯한 노씨 문중이 지역에 덕을 많이 베풀어, 그가 죽었을 때 많은 문상객이 찾아왔고 그 과정을 놀이로 승화시킨 것이 산소골 상여놀이다.
이런 일화들에 비추어 보니 전민동이 과거에 ‘정민’이라 불릴 만했구나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