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8] 정민 정민 정민

by 심성훈


조금 아쉬운 점은 전민동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남성들의 이야기뿐이라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사람 취급을 받은 건 양반 남자들뿐이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효’ 같은 전통적인 유교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그렇고.

기록되지 않았지만, 다른 멋진 존재들의 이야기들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지만, 극히 소수의 가구 수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 대전 교통의 요지로서 서울과 삼남을 이으며 수많은 나그네들이 거쳐 갔던 이곳과 저곳의 사이. 오늘날 대전 생태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갑천까지. 내가 살고 있는 전민동의 특수성은 이방인, 경계, 교차, 연결, 접속, 머묾과 떠남, 흐름의 성격을 보인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옛 모습과 정취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갑천이 흐르고 화봉산이 서 있다.

나는 이곳 전민동의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김만중과 그 일가를 기리는 비석들 옆으로, 머물다 떠나간 것들, 스쳐 지나간 것들, 평온하고 지속적인 삶을 위해 인내한 것들의 그림을 그리고 싶다.

어쩌면 이들의 이야기가 그 어떤 것으로도 손에 잡힐 수 있도록 기록되지 않은 것은, 그것만이 그 의미를 온전히 우리 삶의 유산으로서 남길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라질 것들은 사라지는 대로 두는 것이 섭섭하긴 해도 우주의 섭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허나 그림 그리는 자들의 기본적인 숙명이 질척대는 것이 아닌가. 커다란 캔버스와 그림말이들을 지고 나르며 여기서 저기로 옮겨 다니고, 그 고생스러운 짓을 굳이 시간과 애를 써 가며 하는 것. 그렇다고 너무 쿨하면 얼어 죽을지도 모르니, 적당히 질척대면서 쿨하자.

나를 통해 이야기되기를 바라는 것들이 있어서 창작을 지속할 수 있다. 지금까지 내가 먼저 이야기들을 찾았던 것보다 이야기들이 나에게 다가온 경우가 훨씬 많았다.

창작자로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내 힘과 능력은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스스로의 능력과 자질에 대해 많이 의심하고 고민한다. 그때 내게 다가와주는 이야기들이 있다. 그 이야기들이 새로운 꿈을 주고 미래와 시각적 비전을 보여주기 때문에, 나는 의심을 딛고 일어나 용기를 갖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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