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1] 불꽃들에

심성훈미술생활 '불꽃들에'를 시작하며.

by 심성훈



나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소외된 존재들의 이야기를 회화와 그림책으로 표현한다. 인간과 동물, 삶과 죽음, 내면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탐색하며 삶의 미술적 경험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 일을 하면서 가졌던 생각이나 시선, 작업의 흐름을 기록·관찰·추적하고자 무가지를 제작하게 되었다. 세 가지를 기대해본다.

1. 작업의 경계를 확장해보는 것.

작업의 중심에는 언제나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 서사가 있다. 주변 상황에 대한 관찰과 성찰의 주체가 전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기대어 있었던 탓에, 전시나 작품 발표를 거듭하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점점 얇아지고 무성의해졌다. 무언가를 그리고 싶고, 말하고 싶고, 마구 표현하고 싶은, 이제 겨우 작가로서 발걸음을 내딛은 사람의 폭발력이 힘을 다한 것이다. 더군다나 고작 이삼십 년 정도를 산 나에게 뭐 대단한 것이 있을라고. 이제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시야를 확장하며 작업할 때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온 대로 개인적 경험을 기반으로 하되, 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지역 공동체와 생태계의 이야기로 범위를 확장 해보기로 했다.

헌데 막상 대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섯 살에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사 온 후 전민섬이라고 불리는 동네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전민동은 90년대 초중반에 대덕연구단지 개발과 1993년 대전 엑스포 유치로 발전한 마을이고, 대전의 원도심에 비해 신생의 느낌이 강하다. 대덕연구단지에서 일하는 연구원, 교수, 박사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토박이보다는 외부인들의 마을이다. 처음 만나는 누군가에게 전민동에 산다고 말하면 좋은 동네에 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정작 나는 무관하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새로 만들어진 동네도 대전의 역사이고 오래된 동네도 대전의 역사이며, 대전의 동식물들도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며 씨앗을 날려보냈을 터이니, 마음을 굳히고 대전을 더 알아보기로 했다.

인상파 작가들의 대부 피사로는 황량한 파리 변두리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에게 소중하게 다가온 것들을 그렸다고 하지 않는가. 그저 흔한 인상주의 풍의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피사로라는 한 사람의 심중을 통과해서 들여다보면 돌연 의미심장한 풍경으로 보이는 것이다. 작가의 시선이란 그렇다. 그러니까 26년차 대전 뜨내기이긴 하지만, 나도 한 번 해보자.


2. 작업 과정을 공유하자.

작가가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며 작품을 만들어 내는지 시시콜콜 밝히는 것은 사족일지도 모른다. 영업비밀이나 작품의 약점을 노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완벽보다는 최선에 의지하는 편이기에, 작업을 하면서 겪는 고민이나 문제점, 실수와

실패의 과정들을 나눠보고 싶다.


3. 작업의 흐름을 기억하고 내용을 저장하기.

회사를 다니며 낮에 일하고 저녁에 그림을 그린다. 올해로 4년이 되어간다. 퇴근 후 운동하고 밥 먹고,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하면서 작업까지 하려면 시간에 쫓긴다. 졸릴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생각의 속도에 맞춰 작업하지 못할 때가 있다. 중간에 사라져버리거나 휘발되는 아이디어도 많다. 마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아쉽고, 더러는 우울하기도 하다. 길게는 일주일 이상 작업을 못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작업의 흐름이 끊기고 다시 흐름을 잡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가장 황당할 때는 내가 뭘 하려고 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다. 초기화 된 빈 컴퓨터처럼. 이런 기록이라도 하면, 흐름을 놓치지 않고 좀 더 몰입한 상태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불꽃들에'의 의미.

‘불꽃’과 ‘민들레’의 합성어다.

민들레의 ‘레’ 자를 ‘에’로 바꿔 조사처럼 느껴지게 했다.

불꽃과 민들레는 내 작업의 에센스로 여겨지는 존재들이다. 불의 정령 이블리스로 형상화된 불꽃과 민들레는 소외되고 유약한 존재들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등장한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상충하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느슨한 연결자의 역할을 하며, 어둠 속에서는 밝은 불빛을 비추고 땅속으로는 강한 뿌리를 내린다. (실제로 민들레를 캐는 일을 했었는데, 보기보다 뿌리가 깊고 단단해서 쉽게 뽑히지 않았다.)

이 무가지도 그런 종류의 창작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불꽃들에’라고 지었다.

내용은 대전의 도시·생태계를 리서치하는 [대전생태], 작업·전시·예술가들의 이야기가 담긴 [대전작가] 두 가지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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