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예술청 2022. 03. 15. 화. ─ 03. 19. 토.
계획과 압박
건축가는 공간을 만드는 사람이다. 아직은 없는 공간을 계획하고, 그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건축가가 보통 하는 일이다. 공간은 행위에 영향을 미치기에 좋은 공간은 좋은 활동을 가능하게 한다. 이 좋음을 달성하기 위해 건축가는 여러 가설을 차용한다. 이용자의 특징을 통계화하고, 건물의 용도(프로그램)를 설정하고, 모듈러로 대표되는 수치적인 체계를 활용한다. 타인의 삶을 조직하는 즐거움은 가끔 조작의 즐거움으로 변질된다. 변질된 설계는 배려보다는 조작과 권력 행사가 되고, 과잉된 설계자로서의 자의식이 타자를 향한 배려를 저버려선 불편한 공간을 만든다. 신은 가끔 최고의 아키텍트architect로 수사되지만 건축가는 신이 아니며 신이 되어서도 안 된다.
도시를 거닐다 보면 배려가 부족한 공간을 일상적으로 본다. 가운데에 칸막이가 있어 눕거나 기댈 수 없는 벤치, 사용할 수 있다지만 텅 비어서 어떠한 활동도 이어가기 힘든 공공공간, 행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맘 놓고 쉴 수 없는 휴게공간 등은 사용자를 특정한 방식으로만 행동할 수 있도록 제약한다. 공간이 주는 불편함은 습관으로 몸에 남는다. 계획된 제약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사용자는 수동적인 인간이 된다. 자신이 충분히 누릴 수 있고, 누려야만 하는 공간에서도 눈치를 보며 부담과 불편함을 느낀다. 물체에 앉거나 만져도 된다는 글귀를 크게 붙혀놓아도 주춤거리고, 신체의 말단은 공간의 표면에 닿기도 전에 움찔거린다.
2022년도의 어베일러블러는 공간과 행위의 선후단계를 뒤집는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공간은 행위를 예측하므로써 형성되고, 형성된 공간은 행위를 허하거나 제약한다. 어베일러블러는 이 구도를 뒤집어서 사용자의 특정한 행위가 공간을 만들게 한다. 관람자의 행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화면에서는 공간이 행위에 맞춰간다. 카메라가 포착한 인간과 그 움직임에 따라 흐릿한 형상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데 이 변화는 일면 귀엽기까지 하다. 어베일러블러는 몸의 숨은 권리를 찾는 게임이다.
진화하는 어베일러블러availabler
어베일러블러availabler는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로 정의된다. 가능함을 의미하는 영단어 available에 접미사 er을 붙혀 단어를 생성했다. 이 개념은 스튜디오 잉어의 2019년도 <투룸>전시와 2021년도 <어베일러블러>전시를 거쳐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왔다. 2019년도에는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진을 수집하고 공간을 평가하는 새로운 잣대로의 어베일러블러를 제안하였으며, 2021년도는 인간과 어베일러블러를 인식하는 알고리즘을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개발하였다. 그리고 2022년도에는 인간 이미지를 넣으면 화면상에 그에 상응하는 어베일러블러를 그려내는 알고리즘을 개발해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도 인공지능을 활용했는데 인공지능은 인간과 어베일러블러가 함께 있는 다종의 사진을 학습하고, 학습한 것에서 귀납적으로 규칙을 찾아냈다. 그렇게 찾아낸 규칙을 기준으로 인간 사진을 인식하여 어베일러블러를 그려낸다. 그에 반해 일반적인 설계 과정은 이미 표준화된 프로그램, 치수 등이 디자인을 결정하기에 연역적인 경향이 있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영상은 두 차례의 연산을 거쳐 만들어진다. 21년도의 알고리즘이 이미지에서 인간과 어베일러블러를 구분하면, 22년도의 알고리즘은 그 결과값 중 인간을 대상으로 어베일러블러를 연산한다.
전시 공간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전시장에 들어오면 커다란 스크린이 전면부의 벽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 앞에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하얀 계단 모양의 설치물이 있다. 전시장 후면에는 회색 카펫으로 구분된 공유 서가가 자리한다. 스크린에는 꼴라쥬 된 영상이 있어서 사람의 행위에 맞추어 변화하는 어베일러블러를 보여준다. 대부분 미리 촬영한 영상을 활용하였지만 영상의 한 부분은 관객의 행위를 실시간으로 반영하여 어베일러블러를 합성해낸다. 전시장에는 계단 모양의 설치물을 바라보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고, 카메라가 받아들인 시각 정보는 실시간으로 연산되어 스크린에 송출된다. 관객이 설치물에 앉거나 기댈 때마다 어베일러블러의 모습은 바뀐다. 전시장에서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공유 서가에 앉아 도시와 공간에 관련된 책을 읽을 수 있다.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
어베일러블러는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다. 단순한 영문 이름에 비해 그 설명은 쉽게 읽히지 않는데 문장 작성자의 의도를 존중하지 않고 교정의 잣대만을 들어낸다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은 '자유로운 활용을' 등으로 줄여 표현할 수 있으며, 단어 '도구'에는 이미 인간의 사용을 보조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기에 '돕는'은 빼도 무관하다. 그러나 작가 김다예는 이 설명을 고수했다. 가독성을 좋게 만들기보다는 오독을 막겠다는 굳은 의지로 보인다. 어베일러블러의 설명문은 이것의 가능성과 도구성을 강조하고 있다. 어베일러블러가 존재하는 목표는 (사용자가)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기 위함이라 제시되고, 어베일러블러는 '돕는 도구'라 지시되며 사용자의 활용을 보조하는 도구로서의 용도가 강조된다. 그러므로 어베일러블러는 디자인적 규범이 아니라 가능성이고, 명확한 방법론이 아니라 애매모호한 가능성 찾기이다.
공간의 사용자를, 정확히는 자신이 공간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권리주체임을 잊은 사용자를 어베일러블러는 향한다. 영상은 익명의 사용자들을 주로 보여주지만, 영상의 한 부분만은 실시간으로 관객과 상호작용하여 어베일러블러를 연산해낸다. 관객은 화면속에 재현된 자신과, 자신의 행위에 맞추어 실시간으로 연산되는 어베일러블러를 본다. 그 순간 공간의 점유는 자신과는 동떨어진 사회적인 문제에서 자기 자신의 문제가 된다. 더 나은 자신을 보여주는 꿈 속의 거울처럼 어베일러블러는 더 나은 공간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베일러블러는 물리적으로 구축된 실체가 아니지만 건축적인 무엇이 된다. 작품이 대형화되며 조각과 설치 작품에 공간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이들과 건축의 경계가 약해지는 추세가 있지만 건축은 사용자라는 본성적인 특징 혹은 차이점이 있다. 사용자의 존재는 건축을 건축으로 만든다. 오직 사용자만이 표면으로 드러나는 어베일러블러는 건축가 없는 건축 없는 건축이다.
스크린 건너편에 마련된 공유 서가는 공간적 주체로서의 자기인식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도록 제안한다. 전시장은 개인의 행동을 가장 제약하는 공간 중 하나다. 문화예술공간은 자유로운 영혼으로서의 예술가를 찬미하고 그들의 작품에 권위를 부여하지만 관람객을 특정한 행동 규범 속에 가둔다. 전시장의 빈 공간은 자유롭지 않은 공터이지만 이 전시는 그 구도를 뒤집어보도록 한다. 비록 그 방식이 소극적이더라도 특정한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제기한 질문을 관객이 디지털적으로 체화하게 만들고, 직접 실천하도록 유도한다. 검회색 나무바닥과 다른 카페트 바닥재를 사용하여 해당 구역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곳임을 드러내고 도시를 다루는 책을 비치하여 편안한 시간을 보내거나 도시공간의 질서에 대해 새로운 앎을 얻도록 권유한다.
구름 같은 형상 혹은 가능성
스크린에 어베일러블러가 그려낸 형상은 그 색깔이나 디테일은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흐릿하고 어렴풋하다. 구름과 비슷하기도 한 형상은 주로 엉덩이에서 허리깨까지를 감싸거나 팔을 지탱해주지만 늘어나서 머리 위에 차양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등에 기댈 벽을 만들기도 한다.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였기에 AI가 만들어낸 흐릿한 형상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인간의 뇌는 불명확한 무엇에서도 규칙이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아주 뛰어나며, 불명확한 형상은 적극적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다만 행위의 중심이 앉기에 집중되어 있기에 꼼꼼하게 전시장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으로 의자를 지웠다가 다시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한 작업으로 받아들일 가능성 또한 보인다.
공간의 활용과 자유로운 점유는 스튜디오 잉어의 전작에서도 꾸준히 드러나는 문제의식이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일전의 대화에서 김다예는 '어려운 말로 자신의 작업을 묘사하려고 해봤으나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은 놀이터 만들기였다.'라는 언급을 했다. 놀이터는 공간이 가진 물리적인 가능성이 극대화되는 공간이기에 참 그다운 말이라고 생각했다. 어베일러블러가 보여주는 이타적 가능성과 영웅적이지 않은 낙관주의는 앞으로 어디를 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