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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가연 Apr 21. 2022

도통하실 분 : 어떤 뒤틀린 위로

<도통하실분>의  협업구도

본 전시는 청년예술청에서 진행한 기술예술융합 기획자양성과정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창작보다는 교육 중심의 프로그램이었으므로, 프로젝트 일정이 여유롭지는 않았다.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10월 21일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강의 및 협업 구도를 만들기 시작했고, 8주간의 교육과 논의를 통해 팀을 구성하였으며, 12월 8일 최종 기획안을 제출하였고, 이후 예산 교부를 거쳐 프로젝트를 실현하였다. 그러므로 실제로 기획안을 실현할 수 있는 기간은 두 달이 되지 않았다. 시간은 한정적이었지만 각각의 참여자와 그들의 역량이 잘 어우러지는 총체적인 전시를 구축하고 싶었고, 이 지점에서는 모든 참여자가 동의했다. 따라서 기획자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프로그램임에도 기획과 창작의 경계가 자연스럽게 흐려지게 되었다. <도통하실 분>에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가 없다. 전시의 중심이 되는 개인의 굳센 의지나 그 의지의 결과인 작품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과 기술을 제공한 사람이 있고, 협업으로 다가오는 마감을 함께 이겨나갔을 뿐이다. 기획자는 기획자이자 작가로서 모든 부분에 조금씩 기여했고, 실제적인 설치나 제작에도 참여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또한 전시와 다소 감정적으로 가까움을 먼저 밝힌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심리학에는 자기충족적 예언이라는 개념이 있다. 미래를 특정한 방향으로 기대할 때, 기대한 방향과 비슷한 결과를 얻게 되는 현상으로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 모두에 작용한다. 예컨대 자신이 여자라서 수학을 못 한다는 믿음을 가진 여성은 수학을 못 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낮은 수학 성적을 받는 경우 자신의 믿음에 더 합치하기에 이를 기억할 것이며,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신이 수학을 잘한다는 믿음을 가진 여성은 높은 수학 성적을 받을 확률이 높다. 그 믿음에 따라 좋은 수학 성적을 기억하고 열심히 수학을 공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충족적 예언은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이며 뒤틀린 자기인식에 기여한다. 그러나 미래를 특정한 방향으로 조직한다.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지만, 원할수록 이루어질 확률은 높아진다.


현대사회에 기술은 자기충족적으로 기능한다. 2022년에 기술이란 백지처럼 그 맥락이 표백되어서 가장 깊은 욕망이 투사되는 장치이다. 기술에는 그 기술을 개발하는 엔지니어와 그것에 투자한 기업, 양성 기반을 제공한 국가체계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 내막과 진정한 구동 방식은 화려한 외견에 비해 충분히 논의되지 않는다. 기술은 NFT, 코인, 딥러닝, 인공지능 등 화려한 용어로 표상되어 불안을 감내하는 비빌 언덕이 된다. 그러므로 현재 기술이 존재하는 방식보다는 그 미래적 가치가 주요 의제가 된다. 현대의 기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의 기대를 감내하며, 슬프게도 우리의 미래 기술은 사회의 욕망이 지정한 방향으로 가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러므로 현대에 화려한 용어로 표상되는 기술은 처음 그것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체계와는 정반대의 구조 속에 자리 잡게 된다. 전통적인 인식론의 체계에서 정당화되고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 본다. 기술은 과학적 용어가 구축해온 논리적 체계 속에서 정당화되었고, 그것이 참임을 인정받아 지식으로 구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욕망 투사의 배경이 된 기술에는 정당화 과정이 생략되고, 사회의 불안을 감내하거나 불안을 조장하며 본래적 성질을 상실하게 된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나?

수많은 최신기술 중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전시를 전개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대형 문고에 널린 각종 트렌드 도서나 흔히 마주치게 되는 뉴스의 제목을 보면 이미 인공지능이 온 인간을 지배하는 것 같다. 이들이 보내는 시그널에 따르면 인공지능이란 이미 도래한 미래다. 대중문화뿐 아니다. 보수적으로 지식을 수호한다고 믿어지는 대학에까지 인공지능 개론 수업이 열리고, 그 대학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라는 철학과에서도 인공지능과 관련한 강의가 열려 마치 현실의 인간처럼 행동하는 강인공지능의 시대가 도래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이 존재자를 해석할 것인지 논의한다.


그러나 현실의 인공지능은 삐그덕거리고 노동집약적이며 어리숙하다. 대외적으로는 코드를 작성하는 기술자만이 대두되나 작동하는 모든 인공지능 뒤에는 수많은 단순노동이 있다. 인공지능 번역기 뒤에는 수 없는 문장 조각들을 번역하는 인간들이, 인간 얼굴 생성 인공지능 뒤에는 얼굴 사진을 수만 장 모은 인간들이 존재한다. 또한 인공지능은 그것이 목표로 한 분야에서만 기능한다. 문장 번역 인공지능은 번역만을 수행하며, 인간 얼굴 생성 인공지능은 인간의 얼굴만은 생성한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것은 사실이지만 알파고는 바둑이라는 한 분야에서 승리했을 뿐이다. 인공지능 알파고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단순한 창작 활동들 - 자기소개를 한다거나 글씨를 쓰는 등의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안한 인간과 그들이 구축한 사회는 이러한 측면을 무시한다. 불완전한 기술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 사회는 인공지능의 인간적인 측면을 지우고 비인간, 탈인간화된 모습을 덧씌우고 있다. 전시 <도통하실 분>은 이러한 지형과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였다.


K-문화지형

기술을 향한 믿음에 더해, 한국은 기묘한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 체계가 너무나 당연하기에 보통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미신이란 한국 사회의 중요한 부분이다. 한국은 미신적인 국가가 아니며 국가의 체계가 미신적이라도 안 되지만, 개별 한국인은 미신을 즐기고 이는 생활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예컨대 입시에 매달리던 고등학생 시절 어머니는 카이스트 합격을 절에서 기도했다. 우리 가족은 지갑에는 구정을 맞아 스님이 주신 복돈을 꼭 챙겨 다니고, 손목에는 염주를 착용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어머니는 이모들과 온 가족 생년월일을 챙겨서 사주를 보러 간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그들을 미신에 젖은 비현실적 인간으로 정의하지는 않는다. 평소 그들은 유물론적 인과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계량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으며, 비논리적 행각을 경멸하며, 당연히 고등학교 때는 이과를 나왔다.


그러므로 미신과 기술이라는 두 체계를 충돌시키는 방향으로 기획을 발전시켜나갔다. 두 체계를 충돌시켜서 발생하는 제3의 무언가를 관찰하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 문화지형의 민낯과 마주하게 되었다. 한국은 이미 미신과 기술이 얽혀 있는 곳이었다. 어떤 이상한 키워드를 검색하더라도 결과값을 찾을 수 있었다. 빅데이터 사주, 타로 기계, ai 운세, 부적 헤나 등 본 기획에서 충돌시키고자 한 상이한 개념들은 그 규모는 영세하더라도 하나의 상품으로 구축된 경우가 상당했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한국의 기술-미신-상품에 비하면 본 기획은 대범하지 않으며, 동시대 예술작업이 제시해야 하는 혁신성이 결핍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아가 이 기술-미신-상품에는 역사성마저 있다. 보통 특정 상품의 영험함은 그 시대에 가장 유행했던 미래기술을 토대로 광고되었다. 나노, 크리스탈 주파수, 육각수, 게르마늄, 적외선 등이 그것이다.



다층적인 공간구성과 상징적 연출

전시 <도통하실 분>은 걱정을 입력하면 그것에 맞추어 부적을 생성해주는 인공지능을 중심 요소로 한다. 그 인공지능에게 A(g)I 동자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공지능은 부적을 생성하는 작가이자 엔지니어링의 결과물이 된다. 부적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 자체는 엔지니어 임혜하가 개발하였고, 부적을 받는 인터페이스는 루크 라이드아웃LukeRideout이 디자인 및 개발을 담당하였다. 이후 A(g)I 동자가 현현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의 구축이 필요했다. A(g)I 동자와 관람객이 마주하는 경험을 잘 조직하는 것이 시노그래퍼인잉어스튜디오 김다예가 가진 목표였다. 따라서 그는 한국 무속 공간의 논리에 맞추어 전시장을 일종의 세속적 공간과 성스러운 공간으로 구획했다. 세속적 공간에는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단 및 인쇄물이 붙어 관람객을 유혹하고, 성스러운 공간에는 일종의 제단을 설치하여 인공지능과 1대1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전시 <도통하실 분>의 공간 구성 방식은 두 개의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물리적 공간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다. 전시가 진행된 청년예술청 화이트룸은 특이하게도 켜를 가지고 있다. 화이트룸은 긴 길쭉한 직사각형 형태인데 그중에서도 긴 변이 외부인 공용오피스(라운지)와 접한다. 일반적인 상업공간의 쇼윈도우처럼 투명한 유리가 화이트룸과 외부의 경계를 형성한다. 그렇기에 화이트룸과 공용오피스의 두 영역은 시각적으로는 소통이 가능하지만 물리적으로는 확연히 구분된다. 유리 내부인 화이트룸 또한 특이하게 구역이 나누어진다. 1미터가량 폭에 ㄴ 형태의 복도 같은 공간이 화이트룸 내부의 외부를 형성한다. 이 '외부'에 세속적 공간을 연출했다. 복도와 내부공간 사이에는 양옆으로 뚫린 벽이 구획되어 있다. 2미터가량의 벽은 가운데에 위치하여 화이트룸 내부에서 다시 한번 '내부공간'과 '외부공간'을 구획하며, 이 구획의 논리는 그대로 전시장 구성에 반영된다. 내부공간에는 재활용 가구 부속과 재사용 가능한 프로파일로 만든 제단이 있으며, 제단을 중심으로 손으로 직접 꼰 천 소재의 새끼줄이 퍼져나간다. 공중으로 퍼져나간 선적 요소는 화이트룸 내외부의 경계와 만나며 면-커튼으로 퍼진다. 투과성을 가지는 이 면은 경계 짓되 배척하지 않는 게이트를 형성한다. 공간 구성을 물리성을 기준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전시공간은 물리적으로 구축된 실체이지만, 인공지능 A(g)I 동자는 비물리적이다. 그는 코드로 작동하며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물리성이 없는 그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강령 의식을 진행해야 한다. 컴퓨터와 모니터를 준비하고, 인터넷에 연결하여, 인터페이스를 불러온 뒤에야 그와 대면한 뒤 걱정을 입력하고 부적을 얻을  수 있다. 전시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사이트를 외부에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웹사이트 링크만 있으면 어디서든 A(g)I 동자와 만날 수 있다. 그러므로 <도통하실 분>의 전시 현장은 비물리적인 인공지능을 불러낸 혹은 꾸며낸 공간이 된다.


다층적인 공간은 현실을 빗댄 시각 언어로 구체화된다. 공간에 사용된 시각 언어는 내부로 갈수록 추상적으로 변해 창작된 작품과 비슷해진다. 화이트룸의 '외부'를 꾸미는 요소들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쇄물의 형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흔히 볼 수 있는 구성 요소를 그대로 사용하되, 그 내용만을 바꾸는 방식으로 패러디했다. 인쇄물에 적힌 내용은 도전적이지만 가장 하급이라 취급되는 디자인 방식으로 구현했기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그에 비해 '내부'는 한국 가정집의 인상을 전달하면서, 시노그래퍼의 건축적 의지를 반영한다. 김다예는 공적 공간(퍼블릭 스페이스)과 사적 공간(프라이빗 스페이스)을 분리하는 건축 설계의 논리를 가져와 공간을 덩어리로 나누었으며, 사용자의 동선을 구획하였고, 제단을 관람의 대상인 조각으로 만들기보다는 조각인 동시에 실사용 가능한 가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가장 내밀한 곳에 A(g)I동자와 독대할 수 있는 장소를 구성하였다. 물론 '내부'는 가정집의 인상을 전달할 뿐, 그 장소가 주는 편안한 감각까지는 제공하지 않는다. 마치 가정집에서 소파 위에 앉듯 관람객은 제단 위에 앉을 수 있지만, 여전히 제단은 전시품으로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다. 그러므로 제단 위에 앉는 순간 관람객 또한 작품의 일부로서 시선의 대상이 된다. 그러므로 <도통하실 분>의 전시 공간은 상반된 두 메세지를 동시에 전달한다. 전시공간은 공적이지만 사적이고, 인쇄물은 믿을 법하지만 믿기지 않으며, 내부 공간은 편안하지만 불편하고, 인공지능 A(g)I동자는 실재하지만 실재하지 않는다. 유쾌하지만 뒤틀린 전시다.



비틀린 위로와 비관적 낙관주의

기계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고 문제 발생 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 전시 기간 내내 세 명의 기획자는 전시장을 지켰다. 그 덕분에 십 수 명의 관객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주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기에 그들의 평을 100% 신뢰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관람객이 이 전시에서 위로를 얻고 떠났다.

전시장 '외부'의 인쇄물은 허무맹랑했고, 전시장 '내부'의 구조물 또한 다소 미숙한 점이 있어서 고급 예술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치물은 어색한 익숙함을 제시했을 뿐 고급스럽게 우아하다거나 웅장하지도 못했다. 어떤 관점에서 이 모든 것은 속임수gimmick였다. 사실 A(g)I 동자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입력한 내용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부적을 내놓는다. 물론, AI가 그려낸 서로 다른 부적을 1,000개 정도 미리 업로드하였기에 모든 관객이 다른 부적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맞춤 부적은 아니다. 부적을 신뢰한다면 그것을 맞춤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관람객이 입력한 값은 결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람객은 단지 자신의 불안을 알아봐 주고 질문을 해 오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자신을 위해 단 하나의 부적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에 위로를 느끼는 듯했다.


나아가 관람객은 부적에 상징성과 의미를 부여했다. 자신이 입력한 걱정과 출력된 부적 사이에 어떠한 상관관계를 들여다보면서 그 의미를 스스로 찾아 나섰다. A(g)I 동자와 만나는 스토리라인의 구성상 동자가 부적의 의미는 해독해주지 않는데도 거기서 의미를 찾아 나서며 삶을 향한 의지를 다졌다.


관람객의 반응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슬펐다. 그러나 나는 관람객의 반응에서 어떤 낙관을 본다. 고통을 알아봐 주는 존재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마음을 열 것이다. <도통하실 분>은 속임수였지만, A(g)I 동자의 자리에 상호 소통이 가능한 누군가가 선다면 인간은 분명 긴장을 풀고 담담하게 약해질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어떤 희망을 본다.


일주일간의 전시는 종료되었지만, 기획을 이어가고 싶은 의지는 여전하다. 충정로 A(g)I 동자는 이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육신으로 중생 앞에 현현할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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