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청춘을 지나온 어른들에게
"작가는 말이야.."
미대 재학 중에 교수님들께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그림을 좋아해서 회화과를 가긴 했지만, 작가가 꿈은 아니었다. 미술대학에 11개의 세분화된 과가 있는지도 몰랐고, 그 중에서 회화과가 상당히 가기 어려운 과였다는 것도 몰랐다. 그냥 그림이 좋았을 뿐이다. 하지만, 미대를 가자마자 암묵적으로 우리 모두의 꿈은 작가로 합의되었다. 합의의 주체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모두 작가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졸업 후 10년이 지난 지금, 80명의 동기들 중에 아직도 작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다. 대부분이 디자인 계통으로 취업을 하거나, 학원이나 학교에서 미술교사가 되었다. 드물게는 전공을 과감히 버리고 로스쿨이나 통번역 대학원을 가서 진로를 아예 바꿨던지, 뭉텅이로 승무원이 된 기수도 있다. 개중에 작업을 하고 있는 친구들 대부분은 생계를 위한 무언가를 병행하고 있다. 카페 알바를 하며 작업을 하는 친구, 택배 상하차를 하면서 아이의 분유값을 벌고 남는 시간에 작업을 하는 선배, 프리랜서로 일러스트 외주일을 받고 나머지 시간에 작업을 하는 후배 등이 있다. '그림으로 돈 벌어 먹고 살 수 있어?'는 고등학교 때 미술을 하겠다고 말을 한 순간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였지만, 적어도 나의 80명의 동기들은 정말 이렇게 어려울 것인지 몰랐던 것 같다. 그들 중에는 예술을 삶의 우선순위로 두면서 결혼이나 출산을 미루거나 단념한 이들도 있고, 그 외에도 요즘 세상에 '당연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을 삶에서 놓아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자신의 무언가를 포기하면서 치열하게 예술인으로 남은 이들을 보자면,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는 그들에 대한 경외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일말의 고마움까지 느끼곤 한다.
나는 졸업을 하고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학부생 4학년 때, 졸전을 하면서 난생 처음 그림을 4점이나 팔았다. 수중에 돈이 꽤 쥐어졌는데, 직장인이 되어 보니, 대기업 사원의 몇달 치 월급이었다. 이렇게 작가로 데뷔하는건가 싶은 순간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불투명한 미래를 견딜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예술가로써 이룰 무언가보다도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 심심치않게 할 수 있는 효도, 사랑하는 사람과 그릴 수 있는 미래,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재밌게도 과거의 나는 이 다음 스텝을 '예술학과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미술계를 떠나기는 싫지만,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었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이 좋은 미술을 전파하고 싶다는 순진한 마음으로 미술관의 에듀케이터를 꿈꿨다. 하지만,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나름 글을 잘쓴다는 말을 들어왔지만, 예술학과에서 쓰는 발제문이나 비평문은 내가 생각했던 말랑하고 감성적인 느낌이 아니라 딱딱하고 논리적인 사고와 분석력을 필요로 했고, 내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어린이 미술관에서는 스펙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나를 에둘러 거절했다. 그리고 에듀케이터의 월급은 부모에게 효도는 커녕 그림을 팔아 먹고 사는게 나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 학기만에 대학원을 휴학했다. 국가장학금 대출로 한 학기에 600만원에 이자까지 내면서 다니는 대학원에 이렇게 확신이 없다면, 빠르게 그만 두는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병행하고 있던 스타트업에서도 빠지겠다고 선언했다. 친구가 대표로 있던 스타트업에서 오픈멤버로 지분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었으나, 나보다 앞선 커리어를 가진 사람에게 배우면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과 나는 사회적 기업 같은 곳에서 일하기에는 세속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컸다. 초등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이자 대표에게 '난 아마 다른 회사에 취업을 해야할 것 같아.'라고 말하던 날, 서로 많은 말을 하지 못하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미술 교육 봉사로, 우리의 디자인으로 소외된 아이들에게 멋진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던 꿈을 공유하던 우리가 처음 부딪힌 현실의 벽이였다. 그 날 나의 퇴사는 내가 20대에 겪은 이별 중 가장 아픈 이별이였다.
나에게는 초인적인 힘이 발동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별 했을 때다. 인생에서 몇 번의 다양한 이별을 거칠 때마다, 괄목할만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슬픔의 수렁 속으로 빠지려는 나 자신을 멱살 잡고 끌어내려는 발버둥이자 무언가를 사랑하던 그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리려는 안간힘이었을 것이다. 이번의 이별에도 나는 '취업'이라는 목적에 집중하여 그 어렵던 취업난에 한 달 만에 사회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참으로 특이한 패션회사였는데, 그곳에서 지지고 볶으면서 4년 6개월을 지냈다. 아마 야근한 시간까지 합치면 10년차는 되지 않겠냐며 동기들과 농담을 하곤 했는데,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월급이나 워라밸보다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나 감도가 중요한 아티스틱한 분위기가 만연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매번 돈 내놓고 못가는 필라테스 수업 횟수가 쌓여가고, 저금이라도 할라치면 '우리 일은 아무래도 예쁘게 입고 다니는게 중요하잖아'라고 말하는 상사의 말에 나와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이들에게 둘러쌓여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또 한번의 이직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대기업 연구소에 다닌다. 집 앞에서 회사까지 실어다주는 셔틀버스에 5첩반상이 나오는 구내식당, 사내 헬스장도 있고, 무엇보다 5시 칼퇴근이다. 게다가 미술을 공부하며 키웠던 컬러 감각이나 조색 능력이 십분 활용되는 직업이라 나의 적성에도 꽤 맞는다. 퇴근을 하면, 어릴적부터 배우고 싶었던 발레도 배우고, 좋아하는 영화도 보면서 주말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전시도 가고 가끔은 그림도 그린다.
미대를 졸업한 지 10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이런 삶을 살고 있다. 일과 생활이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 있는 삶, 적당한 때에 부모님에게 용돈이나 여행으로 효도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과 출산을 꿈꿀 수 있는 삶, 저는 화장품 연구원이에요 라고 직업이 한 마디로 정의될 수 있는 삶. 나는 동기들 사이에서는 '능력자'로 비춰지기도 하고, '누구는 뭐 하면서 산다더라', '걔는 어디 다닌다더라'라고 말하기 좋은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이렇게 예술가가 아닌 직장인의 삶도 나쁘지 않다. 아니 꽤나 좋다.
하지만, 가끔은 내가 걸어온 길을 보며 내가 너무 미술과 예술과 멀어져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서글퍼질 때가 있다. 특히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생각은 더해진다. 직장인이 보는 예술가의 삶은 너무나 멋지고, 역동적이고, 다채롭고 황홀하다. 내 작업의 방향을 지키기 위해 갤러리 대표와 싸우고 등돌릴 줄 아는 배짱 두둑한 이야기, 개인전에 걸 작품 운반을 위해 트럭 운전을 직접 배웠다는 이야기. 일생의 하나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저토록 뜨겁고 밀도있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다니! 그에 비해 나의 삶은 너무나 평화롭다 못해 단조롭고, 일률적이고, 플랫해보였다. 어떠한 큰 감흥도 없이 출근, 점심 시간, 퇴근, 출근, 점심 시간, 퇴근-... 나 너무 무채색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지난 주말에 본 영화 <프란시스 하(Frances Ha)>에서 매우 낯익은 인생을 만났다. 뉴욕에 사는 주인공 '프란시스 할리데이'는 무용수를 꿈꾸는 27세의 청년이다. 자신의 이상과는 다르게 무용단에서 전속이 아닌 예비로, 진전 없는 세월을 보내기를 몇 년 째. "직업이 뭐에요?"라고 물어보는 말에는 "설명하기 어려워요. 실제로 하고 있진 않거든요."라고 애매하고 복잡하게 설명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다. 일 뿐 아니라, 사랑도 힘들다. 프란시스에게 사랑은 소피라는 동성 친구를 향해 있다. 프란시스는 남자친구도 있었지만, 남자보다 내 마음을 더 잘 알아주는 친구가 더 좋은 나이다. 내가 뉴욕 최고의 무용수가 되었을 때, 나에 대한 책을 써 줄 소피에게는 어떤 말도 할 수 있고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런 소피가 프란시스를 떠난다. 약혼자와 함께 일본을 가면서.
같이 살던 소피와 헤어지고, 남자 둘이 사는 집의 방 한 칸, 친하지도 않은 무용단 동료의 아파트, 조교에게 무료로 주어지는 대학교 기숙사, 이제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닌 것 같은 부모님 집까지 전전하며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하는 프란시스. 점점 걱정이 되는 것은 월세 뿐만이 아니다. 나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용수에는 한 걸음도 가까워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프란시스가 꿈꾸는 이상적인 삶과는 괴리감이 있는 무용 실력이나 형편들이 자꾸 그를 꿈에서 현실로 끌어내린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란시스는 '무용수를 꿈꾸고 희망'하기만 할 뿐, 그 꿈을 위해 훈련하지 않는다. 영화에서는 프란시스가 무용하는 모습을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친구들이 장난으로 '춤 좀 춰봐' 했을 때, 어설프게 뜀박질을 몇 번 하는 프란시스는 프로의 모습보다는 칭찬 한 마디 듣고 싶어하는 유치원생의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 사람은 말하는 것보다 행동하는 것으로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다 했던가. 프란시스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용수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그저 언젠가 누군가에 의해 심어진 가짜 꿈을 갖고 살아가던 대학생 시절의 나를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일 뿐이다. 각종 알바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가던 프란시스는 결국 무용실 사무업무를 보면서, 퇴근 후에 무용수(dancer)가 아닌 안무가(choregrapher)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우편함에 자신의 이름 'Frances Halladay'를 쓴 종이를 꽂는다. 칸이 좁아 'Frances Ha'까지만 보이게 되는 우편함을 그대로 둔 채로 영화는 끝이 난다.
프란시스는 매우 허황되고, 엉성하고, 가끔은 사람들 앞에서 사랑하던 소피를 흉을 보며 찌질함까지 보여준다. 하지만, 누가 그녀를 욕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영화에서 무엇보다 나 같은 내 모습을 발견했다. 주변 사람들이 현실에 발돋움을 하라 하지만, 어디에도 발 붙이지 못하고 붕 떠있는 상태. 영화는 누구나 거쳐갔을 그런 청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조금은 이상적이고 어설프고 꿈꾸는 듯 이리저리 유랑하는 그 모습에 향수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무용실 사무직원이 되어 전보다 정돈되고 성숙해진 그녀의 모습에 끊임없는 응원과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내가 나를 책임질 줄 아는 어른이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자기성찰과 단념이 있었을지 알기에.
무채색 ( 無彩色, Achromatic Color). 색의 3요소 중에 색상과 채도가 없이 명도만을 가진 색깔의 총칭이다. 색상이 주는 에너지나 이미지가 강하지 않아, 호불호가 적은 색상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백이다. 극장에서 다양한 색감의 향연에 익숙한 우리에게 다소 지루해질 수 있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다채롭게 느껴졌다. 누구나 한 때 화려하고 빛나는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그 무엇보다 지루하게 반복된다. 우리는 그 무채색의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민들레홀씨와 같다. 하지만 멀리서 볼 때 단조롭고 칙칙해보였던 일상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모를 핑크빛 생기가 감돈다. 점심시간에 짬을 내어 분수대 옆에서 안무를 짤 때, 매일 조금씩 시간 내어 짠 안무를 내 이름으로 올릴 때, 퇴근 후 집에서 혼자 좋아하는 무용을 마음껏 즐길 때. 설익은 복숭아 같기도 하고, 가끔은 금방 사라지는 솜사탕 같기도 하지만, 하나의 인생 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어떤 삶이라도 은은한 핑크빛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 그 핑크빛 순간을 위해서는 반복되고 재미없어 보이는 나의 일상이 하루하루를 지탱해주는 무게추가 되어준다.
<프란시스 하>를 보면서 예술가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한 번이라도 꿈을 꾸어본 적이 있는 청춘들의 이야기이다. 그 청춘들은 자라나 모두가 무채색의 삶을 살아내고 있으며, 모두가 살아내는 무채색의 하루하루, 그 자체가 예술이다.
밥 아저씨의 무채색도 참으로 아름답다.
"Bob, I can never paint. Because I'm colorblind.
All I can see is gray tones."
"So I thogut today, we'd do a picture in gray.
Just to show you that anyone can paint."
https://youtu.be/I-ousb8-SD0?si=cXPD_uDbNQBvbQc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