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서 봄
Y는 카페 2층 창가에 앉아 친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는 아직도 한겨울인데,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스하고 온화하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만나기로 한 J는 봄의 여신처럼 밝고 환한 얼굴로 카페에 들어섰다. 그녀는 가게 안을 쓱 둘러보더니 단번에 나를 알아봤다.
"야~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주변의 분위기까지 청량하게 만드는 J의 목소리가 귓잔등을 울렸다.
"똑같지 뭐. 넌 그새 더 예뻐진 거 같은데, 뭐 했어?"
예뻐진 것 같다거나 살 빠진 것 같다는 말은 여자들 사이에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인사말이지만, Y의 눈에는 언제나처럼 친구들을 예쁘게 보는 필터가 장착되어 있었다. 곧이어 종업원이 와서 주문을 받았다.
"카푸치노 주세요."
J는 망설임 없이 카푸치노를 주문하더니 이야기를 이어갔다.
"얼마 전에 감기 걸려서 죽다 살아났는데 그때 살이 좀 빠져서 그런가 봐.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러네."
"그렇게 빠지는 살이 몸에는 안 좋다는데 건강 잘 챙겨. 한 살 더 먹는 거 무시 못 해."
계란 한 판이라는 서른을 넘어서고부터는 친구들 사이에 이런 잔소리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그나마도 미혼인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덕담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옆에서 챙겨줄 사람도 없는데 아프면 안 돼."
"그치, 그치."
연초부터 마주 앉은 두 사람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까륵까륵 웃었다. 별다른 용건도 없이 만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친구만큼 편안한 사이는 없다. 싱글인 친구들이 서로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끈끈한 연 대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문하신 카푸치노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커피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하얀 거품이 몽글몽글하고 풍성하게 올려져 있었다. J는 호로록 소리를 내며 카푸치노를 몇 모금 마시더니 곧바로 잔을 내려놓았다. 카푸치노의 거품이 절반 정도로 푹 꺼져 보였다.
"이제 카푸치노 잘 마시네?"
"그럼, 당연하지. 헤어진 게 언젠데."
J는 짐짓 더 밝은 톤으로 말했다. 실은 괜찮은 척하는 것일지라도 이만하면 많이 좋아졌다 싶어 안심이 됐다. 지난해 가을, J는 6년 사귄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암흑 같은 시간을 보냈다. 회사와 집만 겨우 왔다 갔다 할 뿐 외부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터널을 빠져나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다행이다. 이제 해도 바뀌었는데 새 출발 해야지. 내가 좋은 사람 소개시켜줄게."
"야! 됐어. 좋은 사람 있으면 너부터 좀 만나라. 언제까지 그 사람만 기다릴래?"
Y는 괜히 생각해서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샘이 됐다.
"내가 언제 그 사람 기다린다고 그래? 안 기다려."
"그럼 너도 올해는 연애 좀 해."
"그게 어디 내 마음처럼 되니?"
"하긴, 그건 그렇다. 내가 누구한테 훈수니..."
서로에게 금기어를 툭툭 내뱉고는 슬며시 꼬리를 내리는 두 사람은 각자 속으로 생각했다.
'잘 지내겠지...?'
잠시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먼저 말을 꺼낸 건 J였다.
"새해 목표는 세웠어?"
"새삼스럽게. 작년 목표랑 똑같아."
매년 복사-붙여넣기를 한 듯 똑같은 목표가 다이어리 첫 장을 장식하고 있기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둘 다 거기에 하나씩 추가하자."
J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뭐야, 설마 연애를 목표로 쓰자고?"
"인연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아? 노력을 해야 만나지."
그러더니 J는 다이어리를 꺼내 신년 목표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어 넣었다.
'올해는 좋은 사람 만나기'
"너도 다이어리 줘봐. 내가 예쁘게 써줄게!"
J는 어느 때보다도 힘차고 장난스럽게 말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음악 소리와 어우러져 카페 곳곳에 내려앉았다.
겨울에서 봄이 되는 것처럼, 꽁꽁 얼었던 마음에도 봄의 온기가 스며들고 있을까?
왠지 그녀들의 봄이 지난해보다 따뜻하길 빌어주고 싶은 봄의 문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