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좋은 계절
알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싸늘한 공기가 먼저 창문 틈 사이로 들어와 나를 깨우는 아침이다. 두 볼에 닿은 겨울의 감촉을 느끼며 부스스한 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다. 날씨가 추워져서 좋은 거라곤 이렇게 잠에서 쉽게 깨어난다는 것 정도다. 꿈에서 깬 지 몇 분만에 정신이 번쩍 드는 걸 보니 이제 진짜 겨울 인가 싶어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제 가을도 끝이구나.'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가 몇 분이라도 더 자고 싶지만 이미 잠이 달아나 버려서 차라리 여유 있는 출근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핸드폰으로 요즘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지난 생일에 회사 동기 M에게 선물 받은 블루투스 스피커가 제법 좋은 소리를 들려준다. 노래 가사를 잘 외우지는 못 하지만 제멋대로 흥얼흥얼 따라 부른다. 겨우 조금 일찍 일어난 것뿐이지만 오늘은 토스트라도 먹고 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 냉장고에 있던 식빵을 꺼내 토스트기에 넣고, 나란히 놓인 커피메이커에도 원두와 물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는 제일 작은 프라이팬에 계란 한 개를 올렸다. 이제 몇 분 뒤면 아침이 완성된다. 역시 예상대로 계란후라이가 완성될 때쯤 커피와 토스트도 딱 맞게 준비됐다. 커피 향이 집 안에 구석구석 퍼지자 이제야 온기가 조금 느껴지는 기분이 든다. 토스트에 잼을 발라 먹으면서 다음번에는 꼭 치즈를 사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스트에 치즈가 없으니 왠지 허전한 것 같지만 그래도 빵과 함께 먹는 커피는 언제나 맛있다.
'근사하지도 않고, 거창할 것도 없는데, 이렇게 맛있는 아침을 먹는 게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
매일 반복되는 아침인데도 평일 아침은 언제나 녹녹하지 않다. 출근보다 어려운 건 하루 종일 의자와 한 몸이 되어 회계프로그램을 계속 쳐다보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어쩌다 내가 적성에도 안 맞는 회계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째 하다 보니 입사 동기는 대부분 그만두고 기획팀에서 일하는 M과 나만 남았다. 그래서인지 M은 하나뿐인 동기라며 나를 곧잘 챙겨준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나선 덕분에 출근길 지옥철을 피해 무사히 출근했다. 컴퓨터를 켜놓고 탕비실에 가서 따뜻한 차를 가져왔더니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해있다.
'아침부터 누구지?'
찻잔의 온기로 손을 녹이다 말고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M이었다.
"굿모닝! 내일 저녁에 뭐 할 거야?"
"학교 선배들이랑 촛불집회 같이 가기로 했는데... 왜?"
숫자 1이 사라지기 무섭게 M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그래? 나도 별 일 없으면 가보려고 했는데 끝나고 근처에서 만날까?"
"미안. 나 이미 술 약속까지 다 해버렸는데. 다음에 보자. 오늘 할 일이 많아서 일찍 출근했어."
"그래, 아쉽게 됐네.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날 보자. 파이팅!"
M은 술을 좋아하는데, 내가 술자리에서 하는 말들이 웃겨서 술 마실 때 흥이 난다고 했다. 가끔은 내가 다큐로 던진 말도 예능으로 받는 재주가 탁월하다. 어쩔 때 보면 개그맨의 피를 타고난 것 같기도 하고, 철이 덜 든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월요일 오후. 점심으로 뜨끈한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들어왔더니 몸이 나른하다. 연말연시에는 총무팀에 할 일이 산떠미다. 야근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일해야 하지만 졸음이 쏟아지는 통에 속도가 나지 않는다. 몸이라도 풀어볼까 싶어서 팔을 높이 들어 기지개를 켜는데 어깨너머로 M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어! 뭐야? 왔으면 왔다고 말을 해야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커피 마시자."
"나 지금 무지 바쁜 거 안 보여?"
그랬더니 M이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커피를 내밀어 보이며 말했다.
"졸린 거 같은데, 잠깐 옥상 가서 찬바람이라도 쐬면서 마시자."
"추운데 뭐하러 거기까지 올라가?"
"그러니까 잠 깨러 가야지. 할 말도 있고."
"할 말? 너 설마 그만둔다는 말은 아니지?"
할 말이 있다는 소리에 놀라 외투를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가을이 지나면서 옥상정원을 이용하는 사람도 눈에 띄게 줄어서 지금은 M과 나뿐인 것 같았다. 이따금씩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진짜 추워서 잠이 확 깬다. 옥상이라 더 추운가봐. 커피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찬 바람에 놀란 내가 M을 흘려보며 말했다.
"그러게. 너랑 얘기 좀 하려면 커피라도 사들고 가야 하는구나."
"그러고 보니까 너 지난 주말에 술 마시자고 한 것도 그렇고 좀 수상해. 무슨 고민 있어?"
"말 나온 김에 내 고민 좀 해결해 줄래?"
"뭔데 그래?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봐."
"내가 요즘 푹 빠진 여자가 있는데 도무지 가까워질 틈을 안 주네. 뭐 좋은 방법 없을까?"
"야~ 어떤 여잔데 그래? 그냥 고백해. 돌직구가 최고야."
"진짜 몰라서 그래? 너 말이야 너! 내가 어떻게 해야 넘어올래? 그만 애 태우고 나랑 사귀자."
M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동안 그의 친절을 단순한 동기사랑으로 생각했던 건 능청스러운 M의 유쾌한 성격 때문이었다. 단 한 번도 그가 나를 진지하게 생각해서 호의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왠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언제 나한테 얘기한 적 있어? 난 오늘 처음 듣는데."
찬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다. 옷깃을 여미며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나랑 연애하자. 내가 잘 해줄게."
그의 눈빛은 진심처럼 보였지만 나에겐 대답할 말이 없었다.
"글쎄, 아직은 너랑 손 잡고 싶을 만큼 춥진 않네."
나는 거절도 아니고 허락도 아닌 이상한 말을 내뱉고서 옥상 정원을 빠져나왔다. 그가 나를 뒤따라오며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그 말, 더 추워지면 생각해보겠다는 얘기지?"
"몰라."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는 같이 보내자."
"헛물켜지마."
"뉴스 보니까 다음 주부터 엄청 추워진대. 그러니까 올 겨울부터 나랑 연애하자."
옥상정원에서 내려온 뒤, 나는 졸릴 틈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재채기를 했고, 때때로 '나랑 연애하자'는 그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가 마법주문이라도 거는 건지 날씨가 벌써 추운 것 같았다.
쓰다 보니 조금 긴 이야기가 되었네요.
요즘 날씨도 춥고 나라도 뒤숭숭한데,
그래서 조금은 따뜻하고 웃음 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어요.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