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오전 수업 마치고, 다시 윤성이 하원, 윤성이 낮잠, 집 청소, 저녁 반찬 준비, 샤워까지 마치고 나면 딱 솔이 하원 시간 10분 전이다. 이때 윤성이가 자고 있으면 다행히 녹차 한 잔 여유가 생기고 윤성이 일찍 깬 날엔 폴리랑 로이로 자동차 놀이 중이다. 자동차 놀이하면서 윤성이 입에 뭐라도 챙겨주고 싶어 오늘은 바나나 종종 썰어 우유랑 쟁반에 담았다. 윤성이는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게 귀엽고 귀하다. 맛이 좋으면 다 먹고 자기가 손을 뻗어 입에 갖다 넣을 때 더 귀엽다. 아이들의 귀여움은 언제나 끝이 없는 것 같다. 아이가 주는 기쁨과 사랑은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따뜻하며 언제나 나를 웃게 한다. 이러한 경험을 해 본 자는 분명 느끼고 생각할 것이다. 둘이 어렵지 셋은 쉽다. 셋째 이야기만 해도 남편은 도끼눈으로 나를 째려보지만 그 반응이 재미있어 한 술 더 떠보지만, 사실이다. 둘이 어렵지 셋은 쉽다. (feat. 출산의 카타르시스)
오늘은 오랜만에 남편 이야기를 하려고 자리에 앉았다. 저녁 수업이 있는 날에는 남편이 솔이랑 윤성이를 어떻게든 재워주니 이 시간만큼은 나도 자유부인이 된다. 조급하지 않으면 항상 글을 쓰고 싶은데 오늘은 다행히 남편이 그 소스를 남겨준 날이기도 하다.
남편은 이직을 준비 중이다. 몇 주째 이력서를 정리했고 면접 준비를 마쳤다. 그제, 화요일 남편은 새로운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관심을 거둔다. 물어보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아침에 수업하고 애들 챙기다 보면 남편 생각은 못하고 지날 때가 많다. 늦은 오후나 카톡으로 안부를 묻기는 하지만 나도 남편도 바쁜 하루,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온종일 떨어져 있다가 저녁에 잠시 만나도 반갑고 든든하다.
지난 주말 마지막으로 준비를 마치고 내게 이력서를 보내줬다. 아이들이 다 잠든 밤, 천천히 그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읽어 내려가는데 뭐랄까_ 누구나 이력서엔 자기를 어필하기 위한 적정 수준의 과장이나 포장이 있기 마련인데 남편의 이력서엔 그게 없었다. 그게 없는데도 너무 대단한 성과들, 노력들, 경험들 그리고 진심. 뭐야 이 남자, 이렇게 담백하게 멋있기 있기야?
진심으로 남편이 멋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동안 흘려들었던 회사이야기들, 고민들, 사람들 이야기들이 스쳐 지나가며 얼마나 이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노력하고 일해왔는지 한 번에 와닿았다. 그러면서도 가정에 충실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내내 두통을 안고도 웃으며 퇴근했던 지난날들이 생각났다. 멋있네 이 남자.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어쩌면 내가 남편을 과소평가해 온 건 아닌지, 연하라고 진짜 동생 대하듯 우쭈쭈 하면서 우월감을 느낀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나이가 들면서 특히 애 둘 놓고, 요가원 열고 멀티플레이에 소질이 없구나 느껴며 좀 쭈구리가 되어가는 듯한데 남편은 무르익는 무언가? 성숙함이 느껴진다. 얼굴은 아직도 고등학생인데 아빠가 되더니 진짜 어른이 됐네. 대단하고 부럽고, 이 남자랑 결혼하길 잘했다 생각한다. 이 말은 카톡에 남기지 않았지만, 이력서 너무 잘 썼다고 멋있다고 답을 남겼다. 짝짝.
화요일 면접은 생각보다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영어 면접 끝나고 분위기 좋게 나오려는 찰나, 갑자기 인사팀 부장이 들어와 한국말로 다시 면접을 봤다며 그건 준비가 안돼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면접 끝나고 걸려온 전화기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고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고민 가득한 얼굴이다. 대기업 면접은 처음이라 건물만 봐도 쫄 지경이었는데 면접도 만만치 않았다며 _ 계속했던 말을 반복한다. 아침에 일어나 밥이라도 차려줄 걸 그랬나. 힘 없이 축 쳐진 남편을 보니 내조라고는 안 하는, 나 살기도 바쁜, 코 석자 아내로서 작은 미안함이 든다.
대기업은 면접 보고 돌아갈 때 차비도 주더라면서 돈 이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넨다. 허허 웃으며 내일 점심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말했다. 합격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금방 다시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많이 웃었다. 아이들 이야기하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 이야기하며. 그날 저녁 요가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니 남편은 아이들과 곤히 잠들어 있고 주방 싱크대 수납장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
' 이 돈은 합격하면 보관하고, 불합격하면 치킨이다. '
이번 주말엔 푸라닭을 두 마리 시켜, 아이들과 영상 보며 닭다리 하나씩 뜯을 예정이다. 남편 이직 성공 축하 파티로. 남편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남편이 마음이 가볍고 행복할 때 그 모습을 보는 게 좋다. 열심히 사는 모습도 멋지고 나를 감동시키지만 그래도 여전히 남편의 기쁨이 나에게 제일가는 행복이다.
남편 이직 성공하면, 요가원 돈 많이 벌어서 양복 한 벌 꼭 사줘야지.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