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남편의 긴 글을 읽고 차에서 내릴 때 잠시 휘청였다. 아마 내가 너무 몰랐던 걸까. 남편과의 이혼을 생각할 때 헤어지더라도 적어도 우리답게 헤어질 줄 알았다. 소송이니, 재산 분할이니, 양육비니 이런 말은 잠 못 이룬 지난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내 철없는 순수함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큰 두려움을 이겨내고 이혼 앞에 당당해지겠다는 남편을 말을 듣고 보니, 벌써 승리감에 젖은 남편의 발걸음이 보인다. 나랑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것 자체에서 남편이 평생 동안 두려워했던 어둠, 이별, 헤어짐이라는 것을 극복한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게 결국에는 인생 경험이고 성숙이겠지 생각하니 심지어 그런 남편을 축하하고 격려해 주고 싶은 미친 생각까지 든다.
저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더 멋진 인생을 맞이할까.
그날 저녁 메뉴는 뭐였더라.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양파도 까고, 고기 간도 하고. 뭐 이것저것 만들어 아이들과 저녁을 먹은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떤 선택을 해도 지옥처럼 느껴지던 날들이 통째로 사라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차라리 지진이라도 나서 내 인생이 부서진 줄도 모르게 삶이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렇게 부서지나 저렇게 부서지나 결국 잔해로 남아 살아가는 건 똑같을 텐데 뭐.
결혼 9년 만에 자신의 속 이야기를 다 했다는 남편은 정말 몸도 마음도 가벼웠는지 그날 저녁 아이들을 재우며 잠들어 버렸다. 그래 이혼하자고 말을 꺼내면 그런 기분이겠지,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난 스스로 가학적인 건지 정말 궁금했던 건지, 남편의 육성으로 이혼하자는 말을 듣고 싶었다. 참 이상하지 그렇게 다리가 휘청일 만큼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아직도 모자란 건지 정신이 안 차려지는 건지 꼭 남편의 목소리로 두 눈을 바라보며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잠들어 있는 남편을 깨웠다. 이야기 좀 하자고.
이른 새벽 남편과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나란히.
주방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그렇게 밝은 줄 그때 처음 알았다. 마치 남편과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이 대화를 누가 영상으로 남기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순간이 선명하다.
남편은 천천히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자기 기분에 따라 나에게 감정적으로 대한 적이 있느냐고.
처음부터 너무 세다.
남편은 자신의 최선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남편은 단 한 번도 찡그린 얼굴로 퇴근한 적이 없다. 항상 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온종일 일에 시달리고 힘든 지옥철을 타고 오면서도 현관문을 열 때면 다 잊고 그저 아빠로, 남편으로 우리 곁에 머물렀다. 전에도 말했듯이 회식 한 번 없었고, 조금이라도 늦는 날에는 미안한 목소리로 꼭 전화를 걸었다. 내 저녁 수업이 있는 날엔 급하게 택시를 타고 오면서도 미안한 얼굴로 아이들을 챙겼고 출장을 갈 때도 항상 아이들이 잠들 수 있도록 다 챙기고 늦게 길을 나섰다.
나도 남편의 수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두통이 심할 텐데, 후각이 예민한 사람인데 지옥철에 멀미까지 하고 나면 얼마나 괴로울까를 생각하면 남편의 웃는 얼굴이 너무 고맙고 또 고마웠다. 회식 한 번 없이, 늘 가정에 충실한 남편을 당연하게 생각한 건 아니지만 어쩌면 그것이 지금 우리의 운명이라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회식. 남편은 회사 생활에서 회식이 지니는 의미가 어떤 건지 말해줬다. 회식이란 게 미리 약속되는 일보다 즉흥적으로 그날그날 만들어지는 게 많다고 했다. 자기는 담배도 안 피우는데 회식을 한 번 하고 오면 분위기가 달라져 있다고. 내 편이었던 사람도 회식을 하고 오면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고. 그런 걸 알면서도 다 뿌리치고 가정에 충실하면서 결국 실력으로만 자신을 증명해야 했던 지난날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남편은 정말 담담하게 말했다.
말할 사람이 필요했던 건 사실이라고 했다. 나에게 연락해도 답도 없고 인스타나 뭐 영상이라도 공유하려고 보내면 아이들 보느라 바빠 읽지도 않고, 정서적인 교감을 하기에 우리의 지난날들이 너무 팍팍했다. 그래서 어쩌다 보니 회사 동료들끼리 있는 채팅방에 사람들이 퇴사하면서 결국 손 과장만 남게 되었고, 그렇지만 그렇게 생각 없이 연락한 건 자신의 잘못이라고 했다. 하지만 어떠한 의도나 감정이 있었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이야기 아주 긴 시간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정말 안타깝게도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다. 기억을 안 하고 싶은 건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이 일이 있고 나서 내 머릿속은 단편적으로 순간순간만 기억날 뿐 어제를 떠올리기도 버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남편의 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마음이 편안했다. 처음 보는 남편의 단호함에 이미 백기를 들어 올린 듯 그래, 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지난날들의 최선을 부정할 순 없으니.
이야기를 끝내고 남편은 지난 며칠 동안 내가 했던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래서 달링은 어떻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