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갑자기 이런 제목이 떠올랐다. 해방일지.
요즘은 뭘 봐도 이혼, 불륜, 바람, 외도, 오피스 와이프 이런 단어들만 눈에 쏙쏙 들어온다. 진짜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전엔 우리 부모님의 이혼을 언급할 때 외엔 단 한 번도 머릿속에 스친 적 없는 단어들이 온통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혼 이야기, 다른 사람의 외도 이야기는 사실 읽고 싶지가 않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싶지가 않다. 더 이상 타인의 불행을 소비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해방일지.
어디선가 이런 글을 읽었다.
' 불륜은 실패한 관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
[ 흔히 불륜으로 인해 결혼이나 관계가 깨진다고 생각하지만, 불륜은 실패한 관계의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불륜은 실패한 결혼의 징후이며 서로 이미 사랑이 식어버렸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곧 불륜이라는 의미이다 ]
이 상담 글 곳곳엔 이미 깨어진 신뢰를 다시 쌓을 수 없고, 이미 부서진 관계는 회복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이러면 돈이 될까, 상담을 하려면 충분히 슬픔에 비위를 맞춰주며 관계 회복과 신뢰에 대한 희망고문을 좀 해야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면서 자꾸 상담을 할 텐데 이 글에선 이혼의 단정함마저 느껴진다. 끝난 건 끝난 것이다. all over.
남편과 긴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 부부는 관계 회복이라는 화두로 한동안 시간을 보냈다. 지난날 각자의 입장에서 반성하고 둘의 시간들을 곱씹었다. 언젠가 남편은 설거지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우리 관계를 방임한 것 같다고. 정원에 아이들이라는 꽃이 분명 피고 있지만 부부의 자리엔 잡초들이 무성해 그 터조차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 그 말이 다 와닿지는 않았지만 서로 소홀했던 건 사실이었다. 소홀이라는 표현보다 그저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고, 그래서 모든 것들이 당연하다고 여긴 적은 있다. 너도 나도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이 정도는 해야지, 좀 참아야지, 좀 견뎌야지, 이해를 해야지 _ 이렇게 내 입장만 말하고 뒤돌아선 시간들이 너무 많았다. 충분히 남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은 날들이 많았다. 그게 이유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저 이 생각도 흘러가길 바랐다.
그 후로, 남편과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배려를 다시 시작했고 서로의 상처가 덧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나는 대체로 남편을 기다렸고 말하기보다 들으려 애썼다. 당연하게 기대했던 부분들을 고맙게 생각했고, 그런 시간들이 전처럼 지치고 답답해도 남편 앞에서 웃으려 노력했다. 그게 우리 부부 관계를 회복하고 산산조각 난 지금을 채워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한 적 없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닥치는 대로 그렇게 행동했다.
그러던 어느 금요일, 조금 늦은 퇴근을 한 남편이 밝은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빨래를 개는 내 옆에 앉아 엉성하게 아이들 옷을 둘둘 말면서, 어떤 영화 이야기를 꺼냈다. 그 영화 아냐고_ 그러면서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회사 이야기를 하며 남편은 계속 옷을 둘둘 말았다. 그러다 갑자기 권 이사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만 문장에서 이름만 바꿔 손 과장이라고 말해버렸다. 마치 너무 입에 익어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이름처럼 손 과장이라고.
이 글을 적고 보니, 솔이는 아빠가 집에서 회사 사람이랑 전화만 하면 옆에 가서 손 과장이야?라고 묻는다. 남편의 회사에 사람이라고는 손 과장과 남편 둘 뿐인 것처럼 둘은 우리 가족에게도 이미 단짝이다. 왜 이걸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남편의 말실수를 듣고,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남편이 누군가와 말을 할 때 내 이름이랑 헷갈린 적이 있긴 할까, 내 이름을 불러본 적이 언제였지 그런 생각도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마치 화해하기로 해놓고 이제 와서 그런 생각, 그런 눈물 흘리면 어떡하냐고 누가 비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서둘러 마음을 추스른다. 병나려고 환장한 미친 여자처럼.
그날 저녁, 잠든 아이들과 남편을 뒤로하고 거실에 나와 크게 한숨을 쉰다. 아니야, 아니야 하지 마 보지 마. 혼자 주문이라도 걸 듯 몇 번을 되뇌면서 충전 중인 남편 휴대폰을 집어 든다. 불 꺼진 집 안에 휴대폰 불빛에 빠져들 듯 그 여자의 흔적을 찾는다. 그 정신에 찾아대니 무언인들 불륜이 아닐까, 무엇인들 부정이 아닐까. 날 밝은 때에도 부정은 부정이고 외도는 외도겠지만 지금 내 정신이 도대체 어딜 가고 있는 건지, 숨은 쉬고 있는 건지.
누군가에게 믿음을 잃어버리면 사람이 이렇게 황폐해지기도 하는구나 이렇게 비참하게도 살 수 있구나 두 눈을 찔끔 감으며 그만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또다시 고개 숙여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두 눈을 뜨는 여자가 나라는 걸 기록에 남긴다.
지옥으로 가는 첫걸음을 떼었음을 기록에 남긴다.
지워지지 않길_ 나도 한때는 무엇에도 무너지지 않고 무엇에도 사라지지 않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나의 과거가 지워지지 않길.
내 인생에도 사랑으로 충만했던 봄날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