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오피스 와이프
용서를 할 마음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냥 불현듯 떠올랐다. 용서란 정말 어려운 거구나.
어제 새벽 솔이는 이불에 쉬야를 했다. 남편이 있었으면 새벽녘에 솔이를 깨워 화장실을 한 번 다녀왔을 텐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 찝찝함과 부끄러움, 미안함, 엄마한테 혼날까 봐 걱정에 어두운 방이 무섭기까지. 솔이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엄마, 나 쉬했어'라고 말했다. 그런 솔이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솔이의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새로 옷을 갈아입고, 자리에 누워 다시 잠든 솔이.
왼팔엔 땀이 흥건하다. 꼭 팔베개를 해야 잠드는 윤성이는 열감기가 내렸는지 내 왼쪽 잠옷을 다 적시고도, 누나의 쉬야 소동에도 요동 없이 깊은 잠에 빠져있다. 아이들은 자면서 크는 거겠지.
솔이를 달래고 이불을 갈고 잊고 있었던 알람을 맞추고 다시 자리에 누웠을 때, 아직 채 열두 시도 되기 전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지금 깨면 안 돼, 자야 해. 내일 윤성이 소풍 가잖아, 기분 좋게 아침밥 차려줘야지, 자야 해. 자자.
잠들기 전에 아이들에게 엄마 오늘 너무 피곤해라고 말했지만, 사실 피곤보다는 짜증이 더 컸다. 저녁에 출장 간 남편을 뒤로하고 아이들 샤워를 시키고 있을 때 시어머니한테서 전화가 왔다. 새로 산 솔이 신발 이야기, 주말에 만날 이야기 등등. 옷을 다 벗고 있는 솔이랑 간단하게 통화를 하고 윤성이에게 넘길 때쯤 남편은 출장을 갔다고 말했다. 차로 한 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가서 오늘 하루를 묵는다고 말하자, 어머니는 아이고 우리 아들 멀리 다니네라며 아들에 대한 안쓰러움을 감추지 않으셨다. 집에서 출근할 때도 한 시간이 걸리는데, 한 시간 반 걸리는 곳으로 출장 간 것이 시어머니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는 몰라도 그 순간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 어머니, 한 시간 반 금방이에요!'
이렇게 말을 하고 솔이를 데리고 욕실로 향했다. 아이고 우리 아들이라니, 우리 아들이라니...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편의 외도로 처음 시부모님들께 연락드렸을 때 어머니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너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말라는 식의 뜬금없는 조언을 하셨다. 남편의 외도와 아내 스스로에 대한 투자는 과연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그 문자를 받고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살았나 싶은 마음이 덜컥 들기도 했었는데 우리 엄마가 아니라 그의 엄마라는 사실을 되뇌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또 이 일을 두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며느리가 예민해서 그런다는 말을 친정엄마에게 하기도 하셨었지. 아들이 외도의 벌로 일주일을 회사에 출근을 못했다며 그렇게도 안타까워하셨던 게 떠오르며, 한동안 잔잔했던 내 마음에 거친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그래, 잊어버리는 건 용서가 아닐 테지.
지난달, 남편과 정신없이 할퀴며 마주할 때도 수시로 시부모님들의 연락에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했다. 결국 우리 부부의 문제라 생각했고 전부 진심은 아니었지만 걱정시켜 드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들을 보며 눈물 닦고 미소 지을 때도 며느리라는 자리의 몫은 어김없이 부여되었고, 나름 도리를 다했다. 안부도 여쭈고 아이들과 영상통화도 하고 자주 사진도 보내드렸다. 더 원하신 게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게 내 일상이었으므로.
그런데 남편은 스스로 죄인이 되었다는 마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결백하다는 생각에 친정 엄마한테 전화 한 통 하지 않고, 어떠한 도리도 의무도 강요받지 않고 있다.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아들 고생한다는 시어머니 말 한마디에 울화가 치민다. 너의 자리는 참으로 자유롭구나. 안으로 굽은 부모의 팔 안에서 너는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구나. 남편이 밖에서 애를 하나 만들어 와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지. '미안하다 하지만 너라고 잘못이 한 톨이라도 없겠느냐'라는 식의 이중적인 태도까지 더해지니 무슨 호화 변호인단이라도 만난 것처럼 재수가 없어 침이라도 뱉고 싶어 진다. 그리고 여전히 나만 빼고 모든 사람이 이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해 두 눈을 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윤성이 생애 첫 소풍날, 밤을 새우다니. 인생이 왜 이렇게 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