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솔이가 어린이집에 간 뒤로는 매 끼니를 차리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하루게 두 끼를 먹게 되었다. 운동하고 난 뒤 먹는 아침 겸 점심, 그리고 솔이와 함께 하는 저녁.
솔이 하원 후, 놀이터에서 놀다 보면 허기가 진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솔이 사탕 젤리, 군것질 거리도 안 하고 저녁까지 있으려나 꾀나 배가 고프다. 어제는 유난히 배가 더 고픈 날이라 일찍 저녁을 챙겨 먹었다. 그때 남편 전화가 왔다. 대체로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전화가 오면 칼퇴했다고 자랑하거나 야근을 하겠다는 말을 하는데 어제는 대뜸 '달링 뭐해?'라고 묻는다. 저녁을 먹고 있다고 말하니 '오늘 우리 외식 안 해?' 묻는다.
갑자기 웬 외식, 지난 주말에 엄마가 만들어 놓고 간 집 반찬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듣고 보니 오늘이 부부의 날이니 외식하는 줄 알았단다. 달력 5월 21일 부부의 날에 큰 별표가 하나 쳐져있는 걸 보고 내가 부부의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엄청 기대하는 줄 알고 오늘 온종일 어디 가서 밥을 먹고 축하할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 별표는 새로운 요가학원 알아보고 가는 날이라 그려놓은 거고 그러면서도 나는 부부의 날인 줄도 몰랐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기대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그런 말을 하니 왠지 더 기분이 좋고 고마웠다. 하지만 외식은 무슨, 얼른 집으로 오라고 했다.
친정엄마가 와 계시는 동안 지난번 다툼이 화해도 아닌 것이 흐지부지 된 상태라 부부의 날을 축하하는 게 괜히 어색하기만 했다. 남편은 이 날을 기회삼아 화해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힘이 좀 빠진 상태라 별 생각이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로맨틱한 기분은 온데간데없고 고기 구워 솔이 밥 챙겨줘야지 생각이 먼저 났다.
결혼 후 첫 부부의 날 남편이 퇴근하는 길에 작은 화분 두 개를 사들고 왔다. 앙증맞고 딴딴해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화분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행복이 그리고 믿음이' 그런데 욕심이 과했는지 물을 너무 자주 줘서 그런 건지 행복이와 믿음 이는 그 해를 못 넘기고 뿌리까지 다 말라죽어버렸다. 남은 화분들도 몇 번의 이사를 하면서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다. 우리 부부의 행복이와 믿음 이가 사라진 것이다.
남편은 어떨지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이 우리가 알고 함께 한 시간 가운데 가장 힘든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내가 스물한 살, 남편이 스무 살에 처음 서로를 만났다. 누나 동생으로 오랜 시간을 그냥 이름만 아는 사이로 지내다 본격적으로 연애를 한 건 2년, 그리고 지금 결혼 5년 차다. 남편과 나는 성격도 잘 맞고 웃음코드도 잘 맞고 서로 비슷한 부분도 많다. 솔메이트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남편은 나에게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다.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들을 함께 했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이 배려하게 됐다. 그러니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의 관계가 더욱 단단해져야 할 텐데 이상하게 요즘 삐걱거린다.
생각해보면 남편도 나도 크게 달라진 것 없다. 여전히 서로를 아끼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함을 느낀다.
아마, 남편과 나 우리 각자가 가지는 성장통이 지금의 권태기를 만든 게 아닌가 생각한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독립된 인간으로 누군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면서 진정한 어른으로 성장하는 그 단계마다 우리는 서툴게 삶의 낯섦을 마주한다. 남편도 한 번도 지금의 자신으로 살아본 적이 없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일상이 시행착오다. 어른이 되는 것도, 부모가 되는 것도, 배우자 동반자가 되는 것도 온통 실수 투성이다. 그러면서 성장하는데도 내 눈에 보여야 말이지, 늘 엎어지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은 성장통을 겪고 있다. 남편은 남편의 몫으로 나는 나의 몫으로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 여유가 없겠지. 그래서 우리가 서로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른 채, 부부로 산다는 게 그 고통을 나누고 함께 나아간다는 사실을 잊고 이렇게 날 선 시간들을 보내는 거겠지.
어제 퇴근길 남편의 전화가 다시 한번 고맙다. 언제나 더 날카롭게 날을 세우는 건 나다. 남편은 모난 구석 하나 없이 둥글둥글한 사람이라 그런지 똑같이 힘들고 짜증이 나도 항상 먼저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데, 고생도 안 해보고 곱게 자란 귀남이가 어디서 그런 그릇을 가지고 왔는지 항상 고맙다. 정말 고맙다.
남편은 집에 오는 길 작은 케이크를 사 왔다. 솔이가 그걸 보자마자 먹고 싶다고 상자를 흔들어 대는 통에, 와인도 한 잔 못하고 부랴부랴 초에 불을 부쳐 노래를 불렀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위해. 마지막 불을 솔이가 끄고 급하게 사진 한 장 남기고 케이크를 잘랐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이 행복했다. 솔이 입에 들어가는 딸기 케이크를 보자니 우리 부부가 잘 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이가 그걸 증명해주는 듯 기분이 좋은 순간.
그렇게 우리 부부의 5년 차, 부부의 날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