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야기
이러다간 내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겠다는 다급한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머리에 수건을 감은 채 이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가 특별한 건 아닌데, 이 자리에 컴퓨터 앞에 앉는 순간은 오롯이 나 혼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가족들이 잠든 이 밤, 정말 오랜만에 나의 하루를 기록한다.
조금 전에 창원에 사시는 시이모가 김치를 보내왔다. 남편 이름이 큼지막하게 적힌 택배 상자가 집 앞에 놓여있는 걸 보고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남편은 참 복 많은 사람이다. 그 덕에 나는 금값이라는 핸드메이드 김치를 맛본다. 그런 남편과 결혼한 지 횟수로는 6년 차, 이제 꼬박 5년을 채웠다. 이 글을 지난 일요일 결혼기념일에 썼더라면 더 스위트 했을 텐데.
샤워를 마치고 남편이 접어놓은 팬티를 가져와 입으며 생각했다. 출산할 때 산 이 커다란 면 팬티가 언제 이렇게 노래졌지? 나는 더럽지 않은데 남편이 이걸 개면서 봤을 걸 생각하니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얼른 버려야지. 그러고 보니 우리 관계 안 한지도 너무 오래라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얼마 전엔 남편이 빨래를 개다가 다 뜯어진 내 팬티 두 개를 손으로 꾸깃꾸깃 접어 쓰레기통에 버리기도 했었다. 아 _ 애 둘 놓고 이렇게 무너지나.
지난 일요일, 요가 지도자 과정 수업을 듣는 가운데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 여보,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이야, 페북이 알려줬어 '
고마운 페이스북.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작은 케이크 하나, 초 여섯 개를 챙겨 집으로 왔다. 기념하기보다 오늘은 기록하고 싶었다. 부부 6년 차, 부모 5년 차, 솔이 다섯 살, 윤성이 6개월 나 서른다섯, 너 서른셋의 우리 모습을 사진에 담아두고 싶었다. 이렇게 헉헉 거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지금을 언젠가 페이스북이 또 상기시켜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양치질도 다 했다며 한사코 케이크 한 입 대지 않는 남편을 붙잡고 케이크를 꺼내 초를 꼽고 불을 켰다. 불을 붙이는 남편 엉덩이를 주물럭 거리며 우리가 한 이불 덮고 잔지도 벌써 6년 이구만 이라고 말했다가 아니다, 솔이 태어나고는 각방을 썼으니 신혼 때 말고는 한 이불 덮은 적이 없네라고 말하며 낄낄거렸다. 그런데도 애가 둘이네? 남편도 나도 이런 농담을 하며 웃었다. 오랜만에 둘이서 시간을 보내니 참 좋다. 애들 깰까 봐 조용조용 속삭이지만 그래도 둘이 있으니 참 좋다. 셀카 모드로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어색해하는 남편에게 뽀뽀라도 좀 하라고 시켜 몇 장 건졌다. 이 사진들도 페북이 잘 간직해 주겠지.
그 사진을 이틀이 지난 오늘 다시 보며 생각한다. 지금은 완전한 엄마 모드라 남편 좋은지 남편 귀한지 모르지만 그래도 아내 노릇할 때는 누구보다 남편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프면 체면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다. 그냥 드러눕는 스타일이랄까?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지난주 내내 몸이 안 좋았는데 회복할 시간이 따로 없어 나는 이번 주도 아프고 있다. 오늘은 유난히 어지럽고 속이 불편하고 두통이 심한 날이었다. 너무 힘들어 뚜뚜 분유통을 못 들고 있을 만큼 하늘이 핑핑 도는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주위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너무 서럽게 느껴지는 날. 어렵사리 남편에게 전화를 해 집에 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편은 대부분 이런 전화에는 총알같이 뛰어온다. 남편을 기다리는 30분이 지옥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뚜뚜는 엄마를 보고 웃는다. 나는 울면서 웃는다. 도대체 자식이란 무얼까?
집에 온 남편에게 뚜뚜를 맡기고 그 길로 엎어져 기절하듯 잠들었다. 악몽을 꾼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 길로 양치질을 하고 솔이 데리고 리듬체조 학원엘 다녀왔다. 남편은 뚜뚜 젖병도 씻어뒀고 거실 정리도 해뒀다. 고맙다. 아픈 나를 대신해 뚜뚜도 봐주고 집 정리도 해줬다. 그리고는 회의를 취소하고 왔다며 이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해달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오늘 이렇게 아플 걸 지난주 일요일이나 어제 쯤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그런 날이다. 머리나 말리고 얼른 자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