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팬>은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지만 매번 감탄과 더불어 어렴풋한 불편함이 동반된다.
동심으로 일반화되는 배리의 상상들이 ‘함의’ 쪽에 가깝기 때문 아닐까? <피터 팬> 속 신나는 활극에는 언제나 죽음이 수반된다. 피터는 해적과의 결투는 물론이고 죽음조차 모험의 일부로 여긴다. 이 작품 속 죽음은 일상적이어서 조용하고 기묘한 중의를 덧씌운다.
..그에 관해서는 이상한 이야기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죽으면, 그가 길의 일부분을 동행함으로써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했다.
알려졌다시피 배리가 ‘영원한 아이’를 구상하게 된 것은 죽은 형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을 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유모차에서 떨어져 영원한 아이가 된다는 설정은 관념화된 죽음을 연상시킨다. 개인적인 기억을 ‘영원한 아이’로 박제한 것은 위로 같으면서도 음침한 구석이 있다.
#제임스 배리의 영원한 아이 https://brunch.co.kr/@flatb201/78
피터가 선사하는 짜릿함은 대부분 해방감에서 기인한다. 그 자신의 기원도 켄징턴 공원에서의 탈주로 시작된다. ‘네버랜드’는 유모차에서 굴러 떨어진 아이들이 모여 영원한 아이로 살아가는 곳이다. 아직 인간아이였던 시절 피터는 자신을 두고 미래의 직업을 궁금해하는 부모의 말에 의도적으로 도망친다.
피터의 능동적 선택은 주인공으로서의 후광을 부여받는다. 피터는 이런 후광을 한껏 뽐낸다. 그는 서열상 아래인 존재들에게 가차 없는데 모두 그를 숭배하며 한숨짓는다.
이전 세대 대부분의 동화들이 그렇듯 이 작품의 서사도 ‘남자아이’가 주도한다. 함께 모험을 떠남에도 웬디로 대표되는 ‘여자아이’는 수동적 위치에 머무르며 ‘꼬마 엄마’로 대상화된다.
피터는 스스로 유모차에서 뛰어내려 자신에게 예정된 미래-계급을 부정한다. 피터가 선택한 네버랜드는 그에 의해 깨어나고 잠든다. 전복적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는 리버럴 한 매력의 리더를 중심으로 조직화된 20세기 퍼블릭 스쿨이 연상된다.
#제국, 모험을 떠나다 https://brunch.co.kr/@flatb201/63
피터의 애정은 진심이지만 그 애정을 ‘간직’ 하지는 않는다.
그에게 웬디나 팅커벨의 고유성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영원한 소년이 데려가는 것은 찬란한 시기를 함께 했던, 한때 소녀였던 여성이 아닌 또래의 딸이다.
웬디의 첫 번째 모험 후 피터는 팅커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 땜장이 요정이란 워낙 흔하다는 그를 보면 요정을 살리기 위해 믿음의 구호를 외치라던 전 장면은 뭔데.. 싶어 진다. 그러나 이 순간 피터에게는 조금의 악의도 없다. 그저 나비나 잠자리처럼 요정도 한 철을 오고 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터의 망각에는 의도가 담기지 않아 더욱 냉랭하다.
쾌활함과 잔혹함이 공존하는 유년 자체가 피터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가차 없이 흘러가 피상적인 조각들만 남기고 결국엔 잊혀진다. 웬디도 네버랜드로 돌아갈 생각이 없기에 수순처럼 그녀의 딸이 피터와 새로운 모험을 떠난다.
해적 선장 후크가 운명적 라이벌이 된 것은 각자가 지향하는 에티튜드에서 기인한다.
피터가 리버럴한 매력의 반항아라면 후크는 잘못된 곳에 불시착한 이다. 계급에서 내쳐진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계급 관념이 피터에게는 하찮기만 하다. 후크의 열렬한 사적 욕망은 ‘좋은 모습’을 구사해야 한다는 계급적 강박에 꾸깃꾸깃해진다.
원전에서도 한껏 매력적으로 묘사되는 후크는 해적선에 납치된 웬디마저 매료시킨다.
..맨 마지막으로 나온 웬디에게는 대우부터가 달랐다. 아이러니한 정중함을 드러내며 후크는 우선 모자를 들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뒤, 자기 한쪽 팔을 내밀어 붙잡게 하고는, 다른 아이들이 재갈을 물고 있는 곳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그는 상당히 우아하게 그 일을 해치웠으며, 워낙 섬뜩할 정도로 ‘점잖았기’ 때문에, 그녀는 몹시 매료된 나머지 차마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아직은 어린 여자아이에 불과했으니까.
..후크는 그의 진짜 이름도 아니었다. 그가 실제로 누구인지를 밝힌다고 한다면, 심지어 요즘 시대에조차 이 나라가 발칵 뒤집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행간을 읽은 독자라면 추측했겠지만, 그는 유명한 사립학교를 졸업했다. 그 학교의 전통은 여전히 그에게 옷처럼 달라붙어 있을뿐더러.. 여전히 자기가 다닌 학교 특유의 구부정한 걸음걸이에 맞춰 걸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그는 좋은 모습을 향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더 이상 그와 함께 있지 않았다. 그런 구부정한 걸음걸이는 오래전에 운동장에서, 또는 좋은 일을 했다고 불려 올라갔을 때에, 또는 유명한 담장에 올라가서 담장 경기를 구경할 때에나 나왔던 것이다.
이런 묘사들은 모두 이튼 칼리지의 전통으로 후크가 상류계급 엘리트임을 암시하고 있다. 심지어 역대 왕가 중 하나인 스튜어트 가문의 후손이라 암시된다. 후크의 매력은 상당 부분 태생적 특질에서 기인하는데 이 특질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후크는 자기 자신과 불화한다.
후크가 갑판장 스미를 질투하는 에피소드에는 이런 고뇌가 유쾌하다 못해 절절하다.
스미는 ‘개인 시간이면 재봉틀을 돌리느라 여념이 없는’ 해맑은 캐릭터이다. 스스로를 무시무시한 해적이라 여기지만 어째선지 그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산다. 원전에서조차 웬디는 애완용 해적을 기른다면 스미를 선택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완용 해적이란다~!!)
아이들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침울해진 후크의 고뇌는 스미가 어떻게 모두의 호감을 사는지에 대한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를 무서워하다니! 스미를 무서워하다니! 이날 밤에 범선에 끌려온 아이 가운데 그를 벌써부터 사랑하지 않게 된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아이들에게 끔찍한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차마 주먹으로 때릴 수는 없어서였다.
..어째서 아이들은 스미가 사랑스럽다고 여기는 것일까? 갑자기 끔찍스러운 대답이 튀어나왔다.
‘좋은 모습?’
..좋은 모습이란 무엇일까? 팝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먼저 자기가 그런 자격을 갖고 있음을 본인은 모른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것임을 그는 기억해내었다.
하찮게 보아온 스미에게서 태생적 특질로 자부하던 에티튜드를 발견한 후크는 질투에 휩싸인다. 당장 갈고리로 멍청한 부하를 해치고 싶다. 그러나 그는 곧 결론 내린다.
‘나쁜 모습이야!’
아아! 정말이지.. 새초롬한 집착으로 더욱 하찮은 이 강박이란!
#피터 팬 속 해적 서사 https://brunch.co.kr/@flatb201/78
메르헨 서사를 즐겨 변주한 권교정 작가도 후크의 이런 매력을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권교정의 <피터 팬>은 제목과 달리 후크를 위한 유쾌한 변명 같은 작품이다.
동화를 변주한 작품들은 원전의 매력을 쉽게 차용할 수 있지만 그만큼 유치하거나 뻔해지기 쉽다. 권교정은 주로 주인공이 아닌 주변 인물에 입체성을 부여해 이런 함정을 피해 간다. 그녀의 다른 작품 <피리 부는 사나이>, <백설공주의 계모에 관한>이 여타 패러디에 비해 인상적인 것은 대상화되었던 인물들에게 개연성 있는 각자의 사연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그 사연의 대부분은 연약하거나 애틋하기까지 하다.
#단편집 재발간으로 줄거리는 삭제합니다. 소장의 기쁨을 누리십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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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교정이 그리는 후크는 본편보다 후기에서 그 매력이 드러난다.
원전에서 후크는 뚱뚱한 슬라이틀리를 보며 피터를 공격할 아이디어를 얻는다. 홀로 이를 눈치챈 슬라이틀리는 죄책감에 어쩔 줄 모른다. 후크는 의도치 않게 도움을 준 슬라이틀리를 배려함으로써 죄책감에 무게를 더한다. 짜릿한 승리감을 보일 듯 말 듯한 심술궂은 미소에 담아.
나무랄 데 없는 외모에 우아한 교양과 매너를 구사하지만 이 순간 후크는 진심이다.
권교정은 최선을 다해 정색하는 유치함을 통해 후크와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동일한 그룹임을 묘사한다. 이런 유쾌함은 권교정식 캐릭터 플레이로, 후크가 깨달음 이후에도 네버랜드에 머물 수 있는 근거로 사용된다.
오명에도 약한 존재를 최선을 다해 보호할 때의 후크가 진짜 어른인 것처럼, 최선을 다한 그의 심술은 분명 소년의 마음일 것이다.
자신 안에 여전히 푸른 소년이 살고 있다는 쭈글한 남자들은 너무 흔하다. 자기도취에 타인이 호응해주길 기대하는 이들은 지루하고 어른스럽지도 않다. 소년의 푸르름? 거울을 보자.
흥청망청 유년기를 지나고 나면 현실보다 두려운 모험은 없는 것 같다. 그 안에서 우리는 여전히 유치하고, 정색하고, 치졸하기도 하지만 하루만큼 성장할 수 있길 바란다.
인생의 모든 단계를 성심껏 밟아나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의 모험일 테니까.
@출처/
피터팬, 제임스 배리 (Peter and Wendy, James Matthew Barrie, 1911)
금성 칼라명작 소년소녀세계문학 3권 영국 편, 피터 팬 (금성출판사, 1979, 번역 이영재, 일러스트 다케야마 노보루 竹山のぼる)
에오스 클래식 23, 피터 팬과 웬디 (현대문학, 2014, 번역 박중서)
단편집 붕우, 피터 팬, 권교정 (시공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