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그 남자에게 가버리던 날 나는 선홍색 립스틱을 샀다.’
피로한 어조의 나레이션이 지나면 휘황한 네온사인 속을 울며 걸어가는 한 소녀가 보인다.
타이틀롤 같은 에피소드를 지나 무심히 박힌 제목은 <불의 강 플레게돈>.
<불의 강>은 1989년부터 일 년여에 걸쳐 <월간 르네상스>에 연재된 김진 작가의 중편이다. 동화적 감수성의 애틋한 전작 <시벨>처럼 이 시기 작화는 무척 아기자기하고 섬세하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 게재된 새 연재 <불의 강>은 거칠고 투박한 터치와 먹 작업이 도배된 화면으로 진중하고 우울한 드라마를 예고했다.
박진감 넘치긴 해도 <불의 강> 오프닝이 특별히 개성적인 건 아니지만 교차 편집을 통해 영상 같은 지면을 시도한 듯 느껴진다. 다소 신파적 설정을 안고 있는 서사만큼 순정만화의 영원한 딜레마, 흑발 냉미남과 금발 다정남 캐릭터의 인기가 높았다. 아쉽게도 <월간 르네상스> 연재분 외에 별도의 단행본은 발간되지 않았다.
#시벨, 기다리는 사람들 https://brunch.co.kr/@flatb201/15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고생 ‘유경’은 일본인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동경으로 전학한다. 서먹하긴 해도 새아버지는 좋은 사람이고 엄마의 선택도 수긍하지만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그녀는 자꾸만 겉돌게 된다. (1980년대는 일본문화개방 전인 데다 일본인과의 재혼을 현지처로 치부하는 사회적 편견이 남아있었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일본인 친구 ‘세이코’로 인해 유경은 처음으로 소속감과 우정을 공유한다.
세이코가 짝사랑하는 동급생 ‘미즈하라’는 프랑스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두었다. 밤무대 가수로 아르바이트하며 태평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그는 사실 아버지의 무지막지한 폭력을 피해 가출했다. 유경의 우울을 눈치챈 미즈하라는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미즈하라의 절친 ‘요시로우’는 늦둥이로 태어난 중소 재벌가의 막내아들이다. 아버지의 아낌없는 사랑까지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이 도련님은 물리도록 사고만 친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으로 신분상승 한 한국인이어서? 아니,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사랑하는 아버지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겁 많은 어머니가 감춘 실패한 연애의 흔적이라는 비밀을.
비슷한 우울은 서로를 알아채는 것일까? 요시로우 역시 우울한 유경이 자꾸 궁금해진다.
일련의 사건으로 세이코는 미즈하라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폭력단에 휘말린다. 타의에 의해 폭력단의 일원이 되었기에 미즈하라와 친해진 유경을 목격한 세이코는 분노한다. 그런 그녀를 보며 유경은 다시 외톨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요시로우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으로 고민한다. 요시로우의 비난에 그의 어머니는 사는 게 무서웠을 뿐이란 허약한 변명을 남기고 자살한다. 거듭된 아버지의 폭력 미즈하라는 병들어 가고 있다.
요시로우와 미즈하라가 필사적임을 목격한 유경은 자신의 고통이 유아적이고 나약한 투정이 아닐까 곱씹는다.
해가 바뀌어 유경은 유난히 하얀 얼굴의 미즈하라가 건넨 안부가 작별인사였음을 깨닫는다. 어쩐지 절박해 보였던 요시로우는 인사조차 없이 학교에서 사라졌다.
다시 해가 바뀌어 아직 겨울이 가시지 않은 계절, 서울로 돌아온 유경은 요시로우의 짧은 편지를 받는다.
‘미즈하라는 널 보고 싶어 했었어. 유경아... 널 보고 싶어. –요시로우’
<불의 강>에는 망자가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그리스 신화 속 다섯 개의 강에 관한 인용이 등장한다. 증오의 스틱스 Styx, 슬픔의 아케론 Acheron, 비탄의 코키투스 Cocytus, 분노의 플레게돈 Phlegethon 그리고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망각의 레테 Lethe.
<불의 강> 속 인물들은 봉인된 존재처럼 다섯 개의 강 언저리를 헤맨다. 이 작품 속 가족은 직, 간접적인 가해자이다. 아직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될 것을 강요받는 유경, 물리적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미즈하라, 그리고 모성으로 포장된 감정 폭력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요시로우.
가장 가까워야 할 이가 가한 폭력은 이들을 미완의 상태에 가둔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증오를 거쳐 분노하거나 슬픔조차 잊히는 망각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누군가는 쓸쓸한 인사를 남긴 채 죽어 버리고, 누군가는 자신의 그리움조차 타인에게 덧씌워 표현하고, 누군가는 아득하고 슬픈 꿈같은 이 시기를 홀로 버틴다. 그런 각자의 결말은 성장이라기보다 그저 미완의 상태로 견뎌내는 어떤 한 시기이다.
야심 찬 시작에 비해 <불의 강>은 다소 흐지부지하게 마무리되었다. 묵직하게 질주하던 인물들은 어느 순간 반복된 자기부정으로 공허하다. 중요한 역할 같던 유경의 남자 친구 인호는 세이코처럼 기능적으로 소비된다. 깔아 둔 설정에 비해 약간은 용두사미가 된 찜찜함이 남는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이 작품은 연재 시 제법 많은 항의와 규제에 시달렸다고 한다. 일본이 배경인 점, 일본인이 선한 역인데 한국인은 악역인 점, 출생의 비밀을 안고 일본인의 첩이 된 한국인 여대생, 청소년 탈선 등이 공식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극 중 수위는 청소년의 유흥업소 출입, 바이크 질주 정도다. 물론 탈선이 맞지만 이런 묘사가 극의 개연성과 동떨어져 포르노적 시각으로 쓰이지 않았다. 강간, 투약 같은 강력 범죄도 암시만 하는 수준이다.
인물 설정에 있어 여성 혐오적인 부분도 있지만 이 역시 갈등의 위한 구조로만 쓰였다. 1980년대라는 시대성을 고려하면 이 작품 내 여성 혐오로 지적되는 요소는 당시에 한정해 특별히 도드라진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작가는 이런 설정을 통해 덧씌워진 사회적 편견 -‘문제아, 혼혈, 축첩, 사생아’라는 고민에 관심 두고 있다.
샤방한 학원물이 아닌 느린 호흡의 질척한 분위기도 순정이란 명칭에 투사되는 기대감에 엇갈렸다. 그러나 당시에도 지금도 다른 미디어의 수위가 이보다 덜하지 않았는데 집필 자체가 번번이 규제를 받은 건 역시 만화라는 장르가 안고 있던 수모의 역사일 것이다. 정말 한결같이 촌스러운 조선국이다.
개인의 심연을 집착적으로 살펴온 김진은 집단 속 좌절, 낙망을 섬세히 그려내곤 했다. 그 집단에서 가족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런 시도는 김진의 필모그래피에서 몇 가지 스타일로 구분된다. 가족주의식 위로가 담긴 <별의 초상>, <The Songs> 시리즈, 활기찬 대가족 시트콤 <레모네이드처럼>, <모카커피 마시기>, <여보세요 S.O.S I Love You>를 들 수 있다.
서사상 차이는 있어도 이 작품들은 애틋한 가족애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들은 낙심하면서도 따뜻함을 나누고 희망을 건다. 누군가의 희생에는 그로 인해 구원받는 위로의 정서가 있다.
반면 <불의 강> 이후 발표된 <황혼에 지다>, <숲의 이름>등은 철저히 비관적인 자세를 취한다.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미약하게나마 구원이 되어주던 이들일수록 한층 더 난도질당한다. 가족주의로 눈가림해 지금까지도 당당하기 그지없는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성장통이라기엔 지나치게 잔혹하지만 묵직한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간 두 작품의 기원은 응당 <불의 강> 일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보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은 참 졸렬하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긍정적이기만 한 사람은 때론 아무에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오히려 형태는 달라도 같은 깊이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이들이 위안을 공유하기도 한다. 실재하는 고통 속에서 적어도 여전히 살아남았음을 깨우쳐 주기에, 서로를 구원해 줄 수 없다 해도 이해할 수는 있기에, 이 막연한 시간을 벗어나 완성되길 바라는 간절함에 대한 목격자이기 때문이다.
무해한 낙천주의나 안이한 가족주의에서 벗어나 좀 더 날것의 고통을 직시하려 한 <불의 강>은 그래서 더욱 기억을 도는 작품이다.
@출처/ 월간 르네상스, 불의 강, 김진 (서화, 1989.2-19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