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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Feb 23. 2017

어린이 세계의 명작,  계몽사의‘초록 책’


소년소녀세계명작, 세계수상명작 어쩌구 저쩌구.. 기획전집 특유의 비슷한 명칭 탓인지 계몽사의 전집은 컬러링으로 더 각인된다. 지금 보아도 참신한 작품 선별이 돋보이는 노란 책 <소년소녀 현대세계명작전집>, 고전과 민담을 촘촘히 실은 주황색 책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하얀색 하드커버의 문고판 <계몽사 문고 120> 등 시리즈마다 컬러 구분이 또렷하다.

그러나 계몽사의 전집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은 반딱거리는 진초록색 하드커버, 일명 ‘초록색 책’으로 불리는 <어린이 세계의 명작>을 꼽아야 할 것이다.

#계몽사의 노란 책 https://brunch.co.kr/@flatb201/76

#계몽사의 4·6판 전집 https://brunch.co.kr/@flatb201/91




시작은 <세계의 메르헨>으로부터

일서 중역에 기댄 당시 출판물답게 <어린이 세계의 명작>도 일본의 기획 전집을 들여온 것이다. 원전인 고단샤 <세계의 메르헨 世界のメルヘン, 講談社, 1980>은 출처가 불분명한 민담과 익히 잘 알려진 고전 전래동화-이를 테면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을 묶은 24권 전집이다.

계몽사 판본은 이 중 각국의 민담만 뽑아 15권으로 재편집했다. 때문에 계몽사 판본의 두께는 고단샤 판본의 절반에 못 미친다. 내용면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 위주로 선별한 듯하다. 이케다 히로아키의 <백조왕자>, <엄지공주>, <신데렐라> 같은 원전의 인기작들이 누락되어 아쉬움을 준다. 이 전집의 애호가들이 일본판과 국내판 두 종류를 찾아 헤매는 이유이다.


장르 특성을 고려해도 이 전집 내 이야기들은 다소 얄팍하다. 그럼에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인해 지금까지도 폭발적 인기를 구가한다. 이케다 히로아키, 나오에 마사고, 와카나 케이, 오바라 다쿠야 등 197, 80년대를 풍미한 걸출한 작가들의 집착적이고 섬세한 이미지들은 서사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전후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당시 의뢰를 받았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인생작을 내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키르난 님의 인덱싱 http://esendial.tistory.com/2906


걸출한 일러스트들이 한층 압도적일 수 있었던 데는 북 디자인의 공도 간과할 수 없다.

지인이 소장하고 있던 1980년도 고단샤 판본의 실물을 구경한 적 있는데 시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정말 아름다웠다. 그림책 전집에 가졌던 판타지가 체화된 것 같았다.

워낙 출판 강국인 일본이지만 버블시대의 흥청망청함이 한껏 녹아든 갖은 별색과 섬세한 인쇄 퀄리티는 현재의 고급스러움을 웃돌았다. 파스텔톤 북 케이스에는 당연히 금박이 입혀져 있었고 미묘한 펄감이 도는 종이에 인쇄되었음에도 번짐 없이 채도가 쨍했다. 동심원, 대칭,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본문 레이아웃은 서사의 단조로움을 분해해 리듬감 넘치는 이미지 언어를 구현한다.

고단샤 세계의 메르헨 (@http://egloos.zum.com/grard/v/3849368)


<어린이 세계의 명작>은 일서의 세로 쓰기를 가로 쓰기로 고치고 일부 축약은 했어도 장면 자체를 손대지는 않았다. 때문에 걸출한 편집의 수혜를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하던 당시 호사스러움까지 그대로 가져오진 못했던 것 같다. 미묘하게 색감이 떨어지는 본문은 특히 먹 인쇄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라벤더 블루로 통일된 케이스와 화사한 파스텔 톤의 표지는 좀 더 클래식한 느낌의 진초록에 금빛 별색 처리된 로고로 바꿔 타협을 본 듯하다. (금박이 아니다!) 그래도 이 로고만은 꽤 공들였는지 원전 못지않게 아름답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 표지, 로고




계몽사의 메르헨 시리즈

<어린이 세계의 명작> 성공에 힘입은 계몽사는 라이선스 계약을 통한 일러스트 전집 확보에 힘쓴다. 언제나 함께 언급되는 전집들-명칭마저 비슷한 <어린이 세계의 동화 전 15권, 1983>, <국제판 세계명작 전 24권, 1983>, 196,70년대에 절정을 구가한 디즈니 라이선스를 들여온 <디즈니 그림 명작> 등이다.

계몽사의 메르헨 시리즈는 <어린이 세계의 명작>, <어린이 세계의 동화>, <어린이 한국의 동화> 이렇게 세 전집이 묶여 언급된다. 하지만 일러스트로 이 전집을 추억하는 이들은 <어린이 한국의 동화> 대신 이탈리아 프라텔리 파브리 사의 전집을 원전으로 하는 <국제판 세계명작>을 같은 범주로 묶는 편이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 1980, 어린이 세계의 동화 1983, 국제판 세계명작 1983
어린이 세계의 명작 2012년 복간판. 본편-이미지 북-골든 북 순.


종종 초록색 책과 같은 시리즈로 취급되는 <어린이 세계의 동화>는 고단샤 판본 중 익히 잘 알려진 고전 전래동화를 묶은 것이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이 작자 미상의 민담에 치중했다면 <어린이 세계의 동화>는 안데르센, 샤를 페로와 같이 알려진 작가의 고전 동화들로 구성되었다.

<국제판 세계명작>도 일서로 발행된 프라텔리 파브리 사의 <그림동화 전집 Tutte le Fiabe, Fratelli Fabbri, 1980>을 재편집한 것이다. 이 전집은 축약된 아동문학, 이를 테면 <집 없는 아이>, <걸리버 여행기> 등의 고전 아동 문학을 선별했다.

<어린이 세계의 동화>, <국제판 세계명작> 전집은 유럽 전통 출판사의 원전에 힘입어 시대적 고증이 특히 뛰어나다. 국내 전집들이 모사한 이 전집들의 일러스트 상당수는 일본 작가들이 이탈리아 판본을 베껴그린 모사작들이다.




다시 만난 전집들

<에이브>, <메르헨> 등 복간 요청이 높은 197,80년대 전집 중 실현된 것은 <어린이 세계의 명작>, <어린이 세계의 동화>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삼십여 년 만에 복간된 두 전집은 복간 기념 초회 한정으로 구성되었다. 초판을 온전히 구성한 초록색 표지의 본편 15권, 텍스트가 빠진 일러스트만 실린 하얀색 표지의 이미지 북 15권, 랜덤 증정된 전체 금박 별색 처리된 골든 북 1권이다.

3,000부 한정으로 발행되었기에 내지에는 넘버링이 표기되어 있다. 팬 서비스로 제작된 이미지 북과 골든 북은 입소문 난 일러스트와 더불어 이 전집 세대가 아닌 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21년 5월부터는 대형 서점 플랫폼별로 E-Book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랜덤 증정된 골든 북(좌) 본편의 원화(우)


단시간 내에 품절되긴 했지만 이 복간판의 판매는 기대실적에 못 미쳤다고 한다. 197,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이들 대부분이 구매력을 가진 세대지만 도서 시장의 축소 속에 정작 책을 사는 이들은 정해져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 경우 이 전집에 특별한 애착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구판을 구하기보다 복간판 발행 시 전질을 구매했는데 초판의 재연만큼 저작권 명시에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현행 맞춤법에 따라 바뀐 제목과 표기들은 역으로 이 전집에 대한 향수를 허물었다. 때문에 여전히 짝도 맞지 않는 고가의 1980년대 판본을 찾아 헤매거나, 일본에서 조차 구하기 어렵다는 고단샤 판본을 집요하게 검색하는 애착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출처/ 어린이 세계의 명작 (계몽사, 초판 1980, 개정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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