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소녀세계명작, 세계수상명작 어쩌구 저쩌구.. 기획전집 특유의 비슷한 명칭 탓인지 계몽사의 전집은 컬러링으로 더 각인된다. 지금 보아도 참신한 작품 선별이 돋보이는 노란 책 <소년소녀 현대세계명작전집>, 고전과 민담을 촘촘히 실은 주황색 책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하얀색 하드커버의 문고판 <계몽사 문고 120> 등 시리즈마다 컬러 구분이 또렷하다.
그러나 계몽사의 전집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은 반딱거리는 진초록색 하드커버, 일명 ‘초록색 책’으로 불리는 <어린이 세계의 명작>을 꼽아야 할 것이다.
#계몽사의 노란 책 https://brunch.co.kr/@flatb201/76
#계몽사의 4·6판 전집 https://brunch.co.kr/@flatb201/91
일서 중역에 기댄 당시 출판물답게 <어린이 세계의 명작>도 일본의 기획 전집을 들여온 것이다. 원전인 고단샤 <세계의 메르헨 世界のメルヘン, 講談社, 1980>은 출처가 불분명한 민담과 익히 잘 알려진 고전 전래동화-이를 테면 <신데렐라>, <백설공주> 등을 묶은 24권 전집이다.
계몽사 판본은 이 중 각국의 민담만 뽑아 15권으로 재편집했다. 때문에 계몽사 판본의 두께는 고단샤 판본의 절반에 못 미친다. 내용면에서도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 위주로 선별한 듯하다. 이케다 히로아키의 <백조왕자>, <엄지공주>, <신데렐라> 같은 원전의 인기작들이 누락되어 아쉬움을 준다. 이 전집의 애호가들이 일본판과 국내판 두 종류를 찾아 헤매는 이유이다.
장르 특성을 고려해도 이 전집 내 이야기들은 다소 얄팍하다. 그럼에도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일러스트로 인해 지금까지도 폭발적 인기를 구가한다. 이케다 히로아키, 나오에 마사고, 와카나 케이, 오바라 다쿠야 등 197, 80년대를 풍미한 걸출한 작가들의 집착적이고 섬세한 이미지들은 서사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준이다. 전후 사정이야 알 수 없지만 당시 의뢰를 받았던 일러스트레이터들은 인생작을 내는 기분이지 않았을까?
#키르난 님의 인덱싱 http://esendial.tistory.com/2906
걸출한 일러스트들이 한층 압도적일 수 있었던 데는 북 디자인의 공도 간과할 수 없다.
지인이 소장하고 있던 1980년도 고단샤 판본의 실물을 구경한 적 있는데 시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정말 아름다웠다. 그림책 전집에 가졌던 판타지가 체화된 것 같았다.
워낙 출판 강국인 일본이지만 버블시대의 흥청망청함이 한껏 녹아든 갖은 별색과 섬세한 인쇄 퀄리티는 현재의 고급스러움을 웃돌았다. 파스텔톤 북 케이스에는 당연히 금박이 입혀져 있었고 미묘한 펄감이 도는 종이에 인쇄되었음에도 번짐 없이 채도가 쨍했다. 동심원, 대칭, 대비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본문 레이아웃은 서사의 단조로움을 분해해 리듬감 넘치는 이미지 언어를 구현한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은 일서의 세로 쓰기를 가로 쓰기로 고치고 일부 축약은 했어도 장면 자체를 손대지는 않았다. 때문에 걸출한 편집의 수혜를 고스란히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에 비해 경제적으로 열세하던 당시 호사스러움까지 그대로 가져오진 못했던 것 같다. 미묘하게 색감이 떨어지는 본문은 특히 먹 인쇄에서 확연한 차이가 드러난다.
라벤더 블루로 통일된 케이스와 화사한 파스텔 톤의 표지는 좀 더 클래식한 느낌의 진초록에 금빛 별색 처리된 로고로 바꿔 타협을 본 듯하다. (금박이 아니다!) 그래도 이 로고만은 꽤 공들였는지 원전 못지않게 아름답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 성공에 힘입은 계몽사는 라이선스 계약을 통한 일러스트 전집 확보에 힘쓴다. 언제나 함께 언급되는 전집들-명칭마저 비슷한 <어린이 세계의 동화 전 15권, 1983>, <국제판 세계명작 전 24권, 1983>, 196,70년대에 절정을 구가한 디즈니 라이선스를 들여온 <디즈니 그림 명작> 등이다.
계몽사의 메르헨 시리즈는 <어린이 세계의 명작>, <어린이 세계의 동화>, <어린이 한국의 동화> 이렇게 세 전집이 묶여 언급된다. 하지만 일러스트로 이 전집을 추억하는 이들은 <어린이 한국의 동화> 대신 이탈리아 프라텔리 파브리 사의 전집을 원전으로 하는 <국제판 세계명작>을 같은 범주로 묶는 편이다.
종종 초록색 책과 같은 시리즈로 취급되는 <어린이 세계의 동화>는 고단샤 판본 중 익히 잘 알려진 고전 전래동화를 묶은 것이다. <어린이 세계의 명작>이 작자 미상의 민담에 치중했다면 <어린이 세계의 동화>는 안데르센, 샤를 페로와 같이 알려진 작가의 고전 동화들로 구성되었다.
<국제판 세계명작>도 일서로 발행된 프라텔리 파브리 사의 <그림동화 전집 Tutte le Fiabe, Fratelli Fabbri, 1980>을 재편집한 것이다. 이 전집은 축약된 아동문학, 이를 테면 <집 없는 아이>, <걸리버 여행기> 등의 고전 아동 문학을 선별했다.
<어린이 세계의 동화>, <국제판 세계명작> 전집은 유럽 전통 출판사의 원전에 힘입어 시대적 고증이 특히 뛰어나다. 국내 전집들이 모사한 이 전집들의 일러스트 상당수는 일본 작가들이 이탈리아 판본을 베껴그린 모사작들이다.
<에이브>, <메르헨> 등 복간 요청이 높은 197,80년대 전집 중 실현된 것은 <어린이 세계의 명작>, <어린이 세계의 동화>가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삼십여 년 만에 복간된 두 전집은 복간 기념 초회 한정으로 구성되었다. 초판을 온전히 구성한 초록색 표지의 본편 15권, 텍스트가 빠진 일러스트만 실린 하얀색 표지의 이미지 북 15권, 랜덤 증정된 전체 금박 별색 처리된 골든 북 1권이다.
3,000부 한정으로 발행되었기에 내지에는 넘버링이 표기되어 있다. 팬 서비스로 제작된 이미지 북과 골든 북은 입소문 난 일러스트와 더불어 이 전집 세대가 아닌 이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다. 2021년 5월부터는 대형 서점 플랫폼별로 E-Book 서비스가 시작되었다.
단시간 내에 품절되긴 했지만 이 복간판의 판매는 기대실적에 못 미쳤다고 한다. 197,80년대 전집을 읽고 자란 이들 대부분이 구매력을 가진 세대지만 도서 시장의 축소 속에 정작 책을 사는 이들은 정해져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내 경우 이 전집에 특별한 애착이 있던 것은 아니어서 구판을 구하기보다 복간판 발행 시 전질을 구매했는데 초판의 재연만큼 저작권 명시에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현행 맞춤법에 따라 바뀐 제목과 표기들은 역으로 이 전집에 대한 향수를 허물었다. 때문에 여전히 짝도 맞지 않는 고가의 1980년대 판본을 찾아 헤매거나, 일본에서 조차 구하기 어렵다는 고단샤 판본을 집요하게 검색하는 애착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이다.
@출처/ 어린이 세계의 명작 (계몽사, 초판 1980, 개정판 2012)